파독 광원·간호사 66명 고국 나들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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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피를 팔아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서울 백병원 앞에 길게 줄서 있던 사람들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1965년 3월 서독의 한 탄광으로 떠난 김공부(67)씨가 대한적십자사 초청으로 파독(派獨) 광원.간호사 66명과 함께 지난 9일 고국을 찾았다.

그는 5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잠깐 고국에 들렀지만 이번에 4박5일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울산 현대중공업단지 등을 돌아본 뒤 눈시울을 적셨다.

金씨는 55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갔으나 가정형편으로 3학년 때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느날 노동청의 파독 광원 모집광고를 봤다.

"별 짓을 다했어요. 손이 고와서는 안되기 때문에 틈만 나면 손을 연탄에 비벼댔지요. 몸무게가 신체검사 조건(55㎏)에 못미쳐 밤새 물을 들이켰고 바지 주머니에 돌덩이와 납을 넣은 채 체중계에 올라 겨우 합격했습니다."

그와 함께 서독행 비행기를 탄 합격자 1백여명의 대부분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었다.

金씨는 지하 8백~1천m의 갱도(坑道)에서 하루 8시간씩 숨막히는 작업을 하며 월급 4백~5백마르크(당시 6천여환)의 90%를 꼬박꼬박 집에 부쳤다.

90년 정년퇴직한 그에겐 고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작업 중 왼손을 다쳐 집게손가락 한마디가 짧다.

한편 우리나라는 60년대 초반 파독 근로자들의 임금을 담보로 서독에서 1억5천만달러를 빌렸다.

63년 12월 75명이 광원으로 간 것을 시작으로 77년까지 모두 7천9백36명의 광원과 1만32명의 간호사가 파견됐다.

66년 간호사로 간 뒤 처음으로 고국에 온 우복희(59.여)씨는 지난 10일 경주에서 어머니(72)를 35년 만에 만나 통곡했다.

김용길(52)재독한인광원협회 사무총장은 "조국이 불러줘 평생의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협회의 독일 명칭은 '글뤼크아우프(Glueckauf)'로 갱도에서 행운을 비는 인사말.

이들은 13일 오후 아쉬운 표정으로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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