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노트] 시인 박정만의 '전설' 과 '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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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군사정권 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숨진 박정만(朴正萬.1946~88)시인에 관해 친구 이윤기씨가 쓴 단편소설 '전설과 진실'(『세계의 문학』 겨울호)이 요즘 문단의 화제다.

박씨의 오랜 술친구인 소설가 이씨는 소설이란 형식을 빌려 안타까운 고인의 삶, 이를 지켜봐야 했던 인연을 회고했다. 사건의 출발은 81년 본지 연재소설을 쓰던 한수산씨의 필화 사건이다. 박씨는 사건 전날 한씨와 술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박씨가 군부독재 정권에 항거한 '투사'는 아니었음을 소설은 상기시킨다.

숨을 거두기 전 시인은 이씨에게 "내가 매맞을 까닭이 있어 맞았다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문 그 자체보다는 이후에 겪어야 했던 상황이 훨씬 더 고통스럽단 독백일 것이다. 시인은 이런 상황을 버텨내기 위해 쓰디쓴 독주를 매일 마셨다.

그런데 이씨는 왜 그냥 영문 이니셜이나 가명을 사용해 소설적 허구의 세계로 남겨놓지 않고 박정만이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일까. 이미 고인이 돼 전설로부터 자유로워진 시인을 왜 다시 불러냈을까.

"내가 박정만씨를 폄하하려고 쓴 게 아니에요. 그걸 써놓고 나서 얼마나 목이 메었는지. 처음에는 가명으로 갈까 하다가 전설을 걷어내려고 쓴 것인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어요. 박정만씨가 진실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안 죽었을 겁니다. 나쁜 인간이었다면 민주투사로 자처하면서 살아갔겠죠. 상징 조작을 하면서."

민주투사가 아니었음에도 떳떳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시인을 면박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진실한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고통스러워하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이 편안히 잠들 수 있게 돕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설을 요구했던 사람들과 시대는 또 다른 전설을 지금 만들어 내고 있음을 넌지시 고발한다.

이씨는 "전설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이지 진실이 아니더군요"라며 말을 맺었다.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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