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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세상 탐사] 봉하마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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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호 02면

바위가 거칠다. 바위산은 낮지만 가파르고 험하다. 부엉이 바위다. 오늘따라 많은 사람이 오른다. 바위 아래 나무 사이로 긴 줄이 쳐져 있다. 노란색 추모 리본들이 무수히 달려 있다. 굵은 밧줄이 한쪽 편을 가로막는다. ‘출입금지’다. 사람들은 숙연해진다. 그 의미를 알아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떨어진 곳이다.

바위 꼭대기도 굵은 밧줄로 차단했다. 사람들이 밧줄 사이로 몸을 넣어 들어간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 등판이다. 발 아래로 전직 대통령의 집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더욱 비감에 젖는다. “바위가 험상궂네. 밑이 낭떠러지다.” 20대 부부가 기도하듯 읊조린다. “당신의 국민이라서 행복했습니다. 기억할래요. 사랑합니다.” 봉하(烽下)마을 입구 노사모 사무실 외벽에 걸린 글귀다. 그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애처로움이 담겨 있다.

바위 기슭에 걸린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한자로 ‘死孔明走生仲達’(사공명주생중달)이라고 적었다.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도망치게 했다는 뜻이다. 삼국지에 나온다. 30대 추모객이 화제로 삼는다. “공명은 노무현이고, 그러면 중달은 누군가”라고 물었다. “MB(이명박 대통령) 아닌가-.” “재임 때 검찰을 풀어놓았더니, 퇴임 후 노무현을 덥석 물었지”라고 말한다. 그 죽음은 그들에게 분노와 개탄으로 남아 있다.

부엉이 바위로 시작하는 봉화(烽火)산 능선은 이제 산책 코스다. ‘함께 걷는 대통령의 길’이다. 16일 개장한 그 길은 그런 장면들로 채워졌다. 1주기 행사 일주일 전이다.

산 아래 봉하마을(김해시 진영)에서 부엉이 바위까지 15분 거리다. 노무현 사저 가까이 있는 임시 참배소는 절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 옆에 묘역이 만들어졌다. 삼각형의 넓은 공간이다. 길이 100m에 1000평쯤 된다. 유서엔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로 적혀 있다. 유언과 묘역은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느낌에 대해 건립위의 설명문이 있다. “유언의 ‘뜻’과 전직 국가원수의 묘역으로 ‘예(禮)’를 함께 갖추기 위한 거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조성했다.”

설계는 건축가 승효상씨가 맡았다. 그의 감수성에서 노무현은 ‘자발적 추방인’이다. 기성 제도와 불화를 겪고 스스로를 추방했다는 것이다. 승효상은 이렇게 말한다. “노무현은 생애를 그답게 마쳤다. 우리에게 노무현의 삶은 생소하다. 묘역도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생과 사가 매개되는 광장 같은 묘역이다.”

묘역 바닥에 박석(薄石)이 깔린다. 넓적(2020㎝)하고 얇은(10㎝) 바닥 돌이다. 그중 1만5000개는 추모 글을 담고 있다. 국민 성금으로 만들었다. 박석은 그리움을 표출한다. 그곳에서 노무현은 신화다. 봉하마을은 그 신화를 생산하고 정비한다. 그 이미지는 ‘비운의 투사, 좌절한 영웅’이다. 신화는 위력적이다. 강렬한 충성을 확보하고 있다. 노무현 브랜드의 힘과 매력은 무엇인가.

그 브랜드에는 반전과 역설이 깔려 있다. 그리고 충격적 죽음으로 재충전됐다. ‘바보 노무현’의 소탈함과 연결돼 동정심을 장악했다. 그의 화법은 품격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도자가 쓰는 대중적 언어는 친근감으로 기억된다. 그는 기성 질서를 깨려 했다. 일부 대중은 거기서 대리만족했다.

‘사람 사는 세상’은 그 브랜드의 핵심 가치다. 하지만 세상이 지향하는 ‘가치’와 그것을 실천하는 세상 ‘이치’는 다르다. 젊은 세대에게 사람 사는 세상은 취업이다. 청년 백수를 줄이는 일이다. 그의 참여정부는 서민과 복지를 내세웠다. 그리고 서민과 부자로 편을 갈랐다. 이분법적 대칭으로 세상을 관리했다. 그러나 서민을 외칠수록 강남 아파트 값은 뛰었다. 경제는 어렵고 취업은 힘들어져 갔다. 복지와 성장은 대립의 용어가 아니다. 조화를 이뤄야 취직의 문이 넓어진다. 세상 가치와 이치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비전의 실천은 세상에 대한 균형감각, 건강한 역사관이 있어야 한다.

노무현의 생애는 진화의 삶이었다. 후학과 계승을 다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들은 노무현 브랜드를 어떻게 진화시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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