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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믿느냐 펀더멘털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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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호 33면

1997년 중반, 외환위기의 망령이 우리 주위를 맴돌던 때였다. 경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괜찮다.”

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펀더멘털, 당시엔 생소한 말이었다. 경제의 기초여건이랄까, 실물경제 상황을 가리킨다. 강 부총리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게다. 우리의 실물경제는 잘 돌아가고 있다, 외국 자본이 일시에 빠져나가 잠시 흔들리는 것뿐이다, 기초체력이 튼튼하니 곧 괜찮아진다….

그러나 괜찮다던 펀더멘털, 그 뒤 어찌됐나. 한국 경제는 휘청거렸다. 2008년에도 비슷했다. 미국 월가의 붕괴가 우리 실물경제를 강타했다. 펀더멘털은 좋다는데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는 왜 피하지 못하나.

펀더멘털을 강조하는 분들, 대개 이런 고정관념을 지닌다. 실물경제가 몸통이고, 금융은 꼬리라는 거다. 따라서 금융이 다소 불안해도 실물이 튼튼하면 문제없다는 식이다.

정말 그럴까. 한국은행이 국제결제은행(BIS) 통계를 받아 작성한 자료를 보자. 전 세계 외환거래 규모는 하루 평균 3조2000억 달러다. 여기에 장내·외 파생상품 거래를 합치면 하루에 11조5000억 달러의 외환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이것도 2007년 통계다. BIS는 3년에 한 번씩 이런 조사를 하므로 올해 이 숫자가 업데이트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있었지만 3년 만에 그 규모가 크게 줄지는 않을 듯하다.

이에 비하면 실물경제를 보여 주는 전 세계 교역 규모는 사뭇 왜소해 보인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을 찾아보면 세계 수출입 총액은 2008년 32조 달러가 조금 넘는다. 수출하는 쪽과 수입하는 쪽을 이중 계산하더라도 연간 총액이 금융시장에서 사흘간 이뤄지는 외환거래액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뭐가 몸통이고, 뭐가 꼬리인가? 뭐가 펀더멘털이고, 뭐가 비(非)펀더멘털인가? 덩치로 보면 금융시장이나 외환시장, 그 자체가 ‘울트라 펀더멘털’이다. 펀더멘털을 압도하는 실질적 존재라는 얘기다.

조지 소로스는 93년 8월 비즈니스위크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해 10억 달러를 벌어들인 지 1년 뒤였다.

“펀더멘털의 힘이 과도한 투기를 시정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 수요와 공급이라는 펀더멘털 그 자체를 투기가 바꿔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펀더멘털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 너무나 순진하지 않나. 그런데도 요즘 또다시 펀더멘털을 찾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럽발 재정위기가 제2의 금융위기로 번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달래려는 뜻인 듯하다.

하지만 국제 금융시장은 마치 거대한 괴물과도 같다. 우리의 펀더멘털을 언제든지 흔들어 댈 수 있는 더 강력한 펀더멘털이다. 한번 미쳐 날뛰면 손쓰기 어렵다. 그 앞에서 “우리의 펀더멘털은 좋다”고 아무리 외쳐 봤자 소용없다. 되레 그런 말이 불안감을 안겨 준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자. “우리 내부의 펀더멘털은 괜찮다, 그러나 더 강력한 외부 펀더멘털이 나빠지고 있다, 안전벨트와 헬멧을 챙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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