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104억달러 정말입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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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속담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다. 기대가 너무 성급하다는 말이다. 영국.노르웨이.헝가리 등 유럽 3개국 순방 외교에서 1백4억달러어치의 성과가 있었다는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의 발표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이다.

*** 세일즈 외교의 위력?

이틀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 현지에서 타전된 연합뉴스 기사를 좀 보자. "김대중 대통령은 이번 유럽 3개국 세일즈 정상외교를 통해 총 1백4억1천만달러의 수주성과를 거둔 것으로 집계됐다고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밝혔다." 분야별 수주실적이 뒤를 이었다.

▶외국인투자 유치 41억8천만달러▶건설 및 플랜트 수출 52억6천만달러▶정보기술(IT)분야 진출 9억7천만달러이며, 나라별로는 ▶영국 90억5천만달러▶노르웨이 9억6천만달러▶헝가리 4억달러라는 것이었다.

李수석은 이미 출국 전에 비슷한 수치를 밝힌 바 있다. 이번 순방에서 성사될 것을 취합해 보니 1백억달러를 넘어섰다는 말이었다. 그 때도 분야별 예상 유치실적이 첨부됐다. 아무리 효험있는 세일즈 외교라 해도 어떻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런 숫자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이번 순방의 계기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1백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잦은 외유에 대한 일부의 곱지 않은 시선 등을 의식해 참모들이 세일즈 외교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고 한다. 아주 잘한 일이다. 한 나라의 최고경영자(CEO)로서 대통령이 외국 기업과 자본을 유치하고, 수출 활로를 뚫는 데 보탬이 된다면 칭송받을 일이다. 이런 일들이 바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자리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얘기를 잠깐 옆으로 돌려보자. 달포 전 삼성물산은 무역부문 인력채용 공고를 냈다. 고작 15명 모집이었는데 몰려든 인파는 자그마치 1만명에 달했다. 대학.학점.토익점수 등 여러가지 기준을 다 동원해 1천명까지 추려보니 다들 쟁쟁한 인재였다고 한다. 실무자들이 최종 면접자를 40명으로 압축하기까진 한참 더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고학력 청년실업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1백억달러짜리 외교를 펼치겠다는 李수석의 발언은 국민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외유 나가기 전에 늘 나오는 발표가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서울에 앉아서 어떻게 1백억달러를 따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었다.

청와대 참모진은 애써 벌인 세일즈 외교를 언론들이 평가해 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엄청난 금액을 스스로 무의미하게 만든 자신들을 되돌아볼 일이다.

경험에 비춰보건대 1백4억달러에는 가능한 모든 금액이 포함됐으리라 여겨진다. 이번 순방 이전부터 양국 기업간 오간 얘기(영국 유통업체 테스코의 경우)를 비롯해 이제 막 수출상담을 시작한 것까지 몽땅 거둬들여 합친 숫자일 가능성이 크다. 영국 기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한다는 플랜트 수출건(9개 사업 45억1천만달러)은 아직 입찰도 시작되지 않은 것이라 한다.

*** 수출상담분 합쳤을 가능성

예컨대 한달 매출 실적은 그 달에 실제로 판 것을 잡아야지 상담분까지 합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번 순방에서 우리측이 얻은 소득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금액이 작더라도 그걸 말해야 한다. 실적을 크게 보이려 하는 것을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 한다.

일을 추진함에 있어 지금까지 마무리한 것과 앞으로 할 것을 나눠보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둘이 마구 엉켜 있으면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참모진들은 이번 순방의 실적을 내세우기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챙기는 데 주력해야 한다. 정상외교에서 오간 대화내용을 발판으로 우리 기업과 정부가 합심해 결실을 따내는 방안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심상복 국제경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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