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아파트 옥상의 ‘빛 이기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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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나는 화가 나지만, 그 아파트 주민들은 옥상 조명 덕에 일대의 랜드마크가 됐다며 자부심을 느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초록 띠가 아파트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준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옥상(옥탑) 조명은 대세로 자리잡았다. 주상복합건물이나 고층아파트의 꼭대기에 설치하는 화려한 대형 조명은 ‘왕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왕관 모양이 아니더라도 띠·물결·반원 등 온갖 형태에다 색깔도 붉고 푸르고 희고 노랗고…글자 그대로 형형색색(形形色色)이다.

내가 몸을 새로 의탁한 경기도의 신도시는 아직 곳곳이 공사판이다. 더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비온 뒤 죽순처럼 쑥쑥 들어설 예정이다. 그 많은 건물들이 저마다 랜드마크를 자처하며 옥상에 ‘왕관’과 ‘금테’를 두른 후의 밤 풍경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공유지의 비극’이니 ‘구성의 모순’이니 하는 말은 바로 이런 사태를 일컫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뿜어낸 빛이 남에게 피해를 끼쳐선 안 된다. 신도시의 밤하늘은 사람과 나무·새 등 모든 ‘주민’의 것이다. 밤하늘은 낮과 달라서 충분히 어두울 권리가 있다. 에너지 낭비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데도 ‘왕관’이라니…. 그렇게 천박한 왕관도 있었나 싶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는 교회 부지도 있는데, 건물이 완공되면 십중팔구 다른 교회들처럼 붉은 십자가 조명이 밤하늘에 솟을 것이다. 전국의 그 많고 많은 붉은 조명에 더해서. 다른 더 세련된 신앙의 표현 방법은 없는 것일까.

결국은 배려와 인식 수준의 문제인데, 이게 현장에선 간단하지가 않다. 조명디자인 전문가 정미(이온 SLD 대표)씨는 최근 서울 반포의 한 아파트 외부 조명 작업을 맡아 하면서 입주자단체와 무수히 입씨름을 벌였다고 한다. 주민들이 조명을 무조건 “더 밝게, 더 화려하게” 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주변에 피해를 안 주면서 은은하고 품격 있게 설계해야 ‘빛으로 표현하는 아파트 정체성(lighting identity)’이 구현되는 법이다. 우리는 아직 ‘번쩍거리면 다 금으로 착각하는’ 수준인 것 같다.

정부나 지자체가 나설 법도 한데 아직은 움직임이 미미하다. 시장·군수들이 공공건물의 휘황한 조명을 치적의 척도인 양 생각해 무조건 울긋불긋하게 꾸민 지역도 흔하다. 다행히 서울시가 지자체 중에서는 최초로 지난해 말 마련한 ‘빛 공해 방지 및 도시조명관리 조례안’이 지금 시의회에 상정돼 있다. 서울시내를 필요한 조명의 밝기 등급에 따라 6개 지역으로 나누어 관리한다는 게 핵심이다. 처벌 조항을 못 넣은 게 흠이긴 하지만, 다음 달 시의회를 통과하면 아파트 옥상조명, 교차로 옥외광고판 등으로 인한 빛 공해를 예방하는 데 크게 도움될 듯하다. 서울시는 지난해에 발족한 ‘서울디자인위원회’를 통해 옥상 조명 등 야간 경관이 공해로 전락하지 않도록 행정지도를 하고 있기도 하다. 국회 차원에서는 박영아(한나라당) 의원이 지난해 9월 대표발의한 ‘빛 공해 방지법안’이 특히 주목된다. 상위법으로서 지자체들의 관련 조례를 든든히 받쳐줄 이 법안은 그러나 상임위(환경노동위)에 상정만 된 채 아직 법안심사소위 한 번 못 열었다. 의원들, 특히 여야 지도부의 관심이 온통 딴 데만 쏠려 있었던 탓이다. 엄청난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세상이다. 그러나 ‘빛 공해’처럼 작아 보이지만 사실은 커다란 문제에도 다들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