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중국 경제 대장정] 25. 한국기업의 전진기지-칭다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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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청(淸)나라 북양함대의 기지였던 칭다오는 1898년 독일의 조차지로 넘어가면서 근대도시로 발전했다.

독일의 흔적은 지금도 짙게 배어 어디서나 유럽식 거리풍경을 볼 수 있고, 어디서나 독일이 남겨준 칭다오맥주를 마실 수 있다.

황해를 마주보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탓에 90년대 들어선 한국기업들이 잡중적으로 몰려들었다. 시내에 내걸린 간판중 중국어 다음으로는 한글이 많다고 할 정도다.

"중국으로 공장을 옮길테니 납품가를 중국 수준으로 맞춰달라."

완성품 업체에서 이런 주문을 받은 부품업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세가지일 것이다. 국내에서 어떻게든 원가를 낮추든지, 안되면 거래선을 바꾸든지, 그래도 안되면 중국으로 따라들어가든지. 그러나 말이 '선택'이지 단번에 원가를 낮추거나 거래선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삼성이나 LG를 따라 중국에 동반진출하는 중소기업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칭다오의 서동전자도 대기업과 동반진출한 경우다.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이 아니라 일본의 대기업을 따라 들어온 것이 다르다. 소니.켄우드.샤프의 일본본사와 거래하다 1990년대 초부터 이들이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자 함께 중국에 진출했다. 한종철(韓鐘哲)사장은 일본에 불어닥친 '중국태풍'에 우리도 이미 깊이 휘말려들었음을 실감한다고 했다.

"우리 물건을 써주는 일본기업이 중국으로 조립공장을 옮기는데 우리가 가만히 한국에 남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완제품의 원가가 모두 중국 땅값이나 임금 기준으로 맞춰져 있으니 한국에선 도저히 채산이 안 맞습니다. 중국에 오고 싶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지 않으면 안되는 환경이 되고 말았어요."

단순히 임금차원을 넘어 국제적인 산업구조의 변화가 우리 기업들의 중국행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경제교류가 깊어질수록 서동전자처럼 일본기업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영향받는 곳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에 따르면 일본 제조업체들의 중국 내 생산거점이 최근 7백72개로 북미지역(6백92개)을 넘어섰다. 중국의 시장개방으로 이 숫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그럴수록 한국기업들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셈이다. 자석에 붙은 쇠붙이가 다시 자석이 돼 다른 쇠붙이를 잡아끄는 것과 마찬가지다.

칭다오의 청양(城陽)지구에는 중국의 자력에 직접.간접으로 이끌려온 한국기업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다. 여기저기 한글로 된 '소개소'간판이 눈에 띈다. 한국인들을 위해 부동산.통역원 등을 소개해주는 곳이다. 워낙 이런 한글간판들이 많다 보니 마치 한국의 지방공단에라도 온 듯한 인상이다.청양지구는 이제 부지가 모자라 한국기업이 더 들어오고 싶어도 공장 지을 곳이 없을 정도다.초기에는 저임을 노린 의류.완구 등 경공업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전자.전기부품으로 다양해졌다.

韓사장은 "칭다오는 포화상태"라며 "그 넓다는 중국땅도 쓸 만한 곳은 마치 콩나물 시루"라고 말한다.칭다오의 한국기업은 적어도 6백개,많으면 1천여개를 헤아린다.칭다오의 외자기업 중 60%가 넘는 숫자다.상주 한국인만도 3만여명이다.

중국행을 결심한 한국기업들이 이처럼 칭다오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칭다오 진출 10년째인 대광모드 주원(朱□.50)사장은 그럴듯한 답변을 준다.

"선전(深□)은 홍콩이 버티고 있고 상하이(上海)는 중국세가 너무 강합니다. 또 다롄(大連)은 일본의 텃밭이지요. 동북3성 내륙도시는 물류비용이 많이 들고 톈진(天津)은 공해문제가 있습니다. 칭다오는 그런 벽이 없으면서 한국으로 이어지는 물류 인프라가 '베스트'입니다."

朱사장은 지금 칭다오와 서울을 '1일 생활권'으로 뛰고 있다. 한달에 두세번씩 서울을 드나든다는 그의 출장일정을 보자.

'서울 답십리 본사, 오전 9시 회의.

오전 10시 공항으로 출발.

오후 1시발 비행기 탑승.

오후 1시30분(현지시간) 칭다오 도착.

오후 2시 공장 도착,회의 및 결재.'

칭다오와 서울을 오가며 하루를 낭비없이 풀가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오너가 직접 뛰어다녀야 하는 한국의 중소기업에게는 대단한 매력이다. 화물의 이동도 마찬가지다. 인천으로는 페리가 주2회, 부산으로는 화물선이 매일 오간다.

칭다오를 중심으로 한 산둥(山東)성 중국 근로자들에 대한 평판도 나쁘지 않다. 중국 내에서도 타지역에 비해 충직하다고 알려져 마오쩌둥(毛澤東)이 경호원으로 많이 데려다 썼을 정도다.

이런 입지를 활용해 칭다오를 새로운 사업의 전진기지로 삼으려는 한국기업도 나왔다. 국내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금호는 3년 전 칭다오 첨단기술단지에 3천5백만달러를 들여 최신식 스낵공장을 세웠다. 주력상품은 초코파이.

금호가 과자도 만드느냐는 조건반사적인 질문에 유성택(柳盛澤)영업부장은 "중국에 제2의 금호그룹을 세우자는 전략에서 단시간 내에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식품사업에 뛰어들었다"고 설명한다.

칭다오에서 자리를 굳히면 상하이.베이징(北京).선양(瀋陽)에도 차례로 공장을 차릴 계획이라고 한다. 저임금 하나만 해결하면 충분하던 한국기업들이 이제 칭다오에서 국제분업에, 중국내수에, 물류까지 감안한 고차방정식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정재(경제연구소).남윤호(도쿄 특파원).양선희(산업부).정경민(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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