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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전문성 없는 예산 심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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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예산 편성과 심의는 정부와 국회가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현 정부 출범 이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을 넘겼으며, 거의 매년 추경예산을 편성했다.

이번 정기국회도 회기 내에 내년 예산을 처리하지 못하고 임시국회로 넘길 모양이다. 이처럼 예산심의가 법정시한을 넘기고 추경편성을 밥먹듯 하는 국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라니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 거의 매년 2회 추경편성

법정시한을 넘기고 추경편성을 하면서도 예산 편성과 심의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이 정도 부끄러움은 문제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국회 예결특위에서 예산안을 심의하는 모습을 보면 예산안에 대한 질의내용이 양적.질적으로 부족해 예산편성과 심의가 제대로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무너뜨린다. 이대로는 안된다.

나라살림이 이런 절차와 이런 사람들에게 맡겨져서는 안된다. 국민이 내는 세금을 모아 나라살림을 어떻게 잘 꾸려나갈까 고민하는 것 이외에 국회의원이 신경을 써야 할 게 그렇게 많다면 어떻게 국회에 나라살림을 맡길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몇가지 해결책을 제시해 본다. 첫째, 국회의 예결산 부실심의를 방지하고 전문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미국은 각종 예산사업에 대한 평가를 전문으로 하는 국회 예산처(CBO)와 회계감사.결산감사를 하는 우리의 감사원에 해당하는 GAO(General Accounting Office)를 국회 내에 설치하고 있다.

이들 기구의 도움으로 상하원 모두 일년 내내 예산과 결산에 대한 평가작업에 몰두할 수 있다. 우리도 미국의 CBO에 상응하는 예산 관련 연구개발기구를 국회에 신설해 부처별 예산의 타당성 조사와 성과평가를 연중 내내 실시해야 한다.

둘째, 투명하고 정확한 재정정보를 만들고 공개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하는 재정투명성 규약과 OECD의 지침대로 정부의 과거.현재 및 향후 재정활동과 관련한 완전한 정보가 일반에 투명하게 제공돼야 한다.

국회에서 심의하는 재정규모인 일반회계와 재정융자특별회계 이외에도 특별회계와 기금을 포함하는 통합재정의 구체적 내용이 공개돼 보다 철저하게 국민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관리되고 평가돼야 한다.

예를 들어 정부는 내년 통합재정수지가 국내총생산(GDP)의 1.1% 수준의 흑자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만 공개할 것이 아니라, 13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기금의 대규모 흑자 부분을 제외하면 1.3% 적자가 될 것이라는 점도 공개해야 한다.

아울러 IMF 기준 국가채무 규모와 함께 보증채무의 총 규모 및 회수가능 규모를 파악하고 공개해야 한다.4대 공적연금을 중심으로 하는 4대 사회보험의 재정수지 현황 및 기금운용 역시 수시로 발표함으로써 중장기적인 재정운용상 문제점을 사전에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셋째, 재정건전화를 위해 중장기적 재정운영계획과 법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공적자금 회수전망이 지극히 불투명해 재정위기 발생 가능성이 한층 커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이와 같은 체계적인 재정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년에 두차례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예상되는 선심성 예산과 세금깎아주기 경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도 대책은 필요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1999년 발표된 중기재정계획을 현 상황에 맞게 수정하고 이를 기초로 매년 예산편성과 심의가 이뤄져야 한다.

*** 중장기 재정계획 마련을

중기재정계획을 3년 전에 발표한 후 한번도 수정한 적도, 그리고 이를 기초로 예산을 짜본 적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나라살림이 계획적.체계적으로 꾸려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지난 봄 국회에 상정된 국가채무축소를 위한 특별법.예산회계법.기금관리기본법 등 재정3법의 제정.개정이 이번에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2002년은 우리가 일본처럼 장기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도약하는 기회를 잡을 것인가가 결정되는 중요한 한해가 될 것이다. 2002년 예산을 지금같이 짠다면 중남미 국가가 경험한 재정위기에 이은 외환위기의 악순환이 시작되는 한해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安鍾範(성균관대 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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