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중국 경제 대장정] 22. 세계를 휩쓴 중저가 가전-순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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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순더(順德)는 아직 우리에겐 낯선 지명이다. 그러나 순더의 체취는 이미 우리네 생활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몇년 전부터 큰 인기를 끈 선풍기처럼 생긴 난방용 히터는 이젠 웬만한 가정의 필수품처럼 돼 있다. 이걸 만들어 전세계에 뿌린 게 순더의 가전공장들이다. 토스터.안마기.콩나물재배기 등등…. 유명 상표가 붙지 않은 중저가.중소형 가전제품이라면 일단 순더에서 생산돼 배를 타고 한국에 건너온 것으로 봐도 된다.

순더에선 전자레인지가 1초마다 한대씩 나온다. 냉장고.에어컨은 12초마다 한대꼴이다. 광둥성의 한 소도시가 지난해 중국 가전제품 생산액의 15%나 되는 60억달러어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순더가 '중국의 가전공장'에서 나아가 '세계의 가전공장'으로 불리는 이유다.

순더의 가전제품은 가격경쟁력에서 세계 최고다. 1993년 의류회사에서 전자레인지로 생산종목을 바꾼 거란스(格蘭仕)는 불과 8년도 안되는 사이에 중국 시장의 80%, 전세계 시장의 30% 가량을 차지했다. 전자레인지 한대 가격을 1백달러 이하로 끌어내린 초저가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거란스는 95년부터 세계 가전회사들의 위탁생산을 거의 독식하고 있다.

또 다른 순더의 대표기업 SMC는 거란스에 밀린 전자레인지 사업을 미국 월풀사에 팔아치우고 선풍기 쪽에서 살 길을 찾았다.

SMC는 선풍기 가격을 거푸 끌어내리면서 세계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했다. 유럽의 호텔 등에서 쓰이는 천장선풍기를 일반 선풍기값에 내놔 웬만한 집 거실 천장에 선풍기 바람을 일으킨 것도 SMC다.

순더 가전의 경쟁력은 대량생산에서 나온다. 더 싼 값에 더 많이 공급하기 위해 순더의 공장들은 규모를 키우는 데 전력했다. 중국의 10대 가전기업중 하나인 커룽(科龍)은 매년 냉장고 10만~20만대, 거란스는 전자레인지 1백만대 이상씩 생산능력을 키워왔다.

순더의 성공신화는 중국에서도 모범사례로 꼽힌다. 순더는 92년 도시로 승격하기 전까지는 중국의 평범한 농촌마을 중 하나에 불과했다. 순더 주민들은 개혁.개방을 최대한 이용했다.

홍콩과 지척인 거리상 이점을 들어 홍콩의 공장을 자처하고 나섰다. 당시 홍콩-중국간 '홍콩엔 본사, 광둥성엔 공장'방식의 경제협력 강화에 편승해 적극적으로 홍콩의 위탁공장화에 나선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을주민이 나서 기업을 차리고, 부품을 생산했다.

먼저 시작한 가전산업은 9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발전을 거듭해 순더의 지난해 1인당 소득을 상하이.선전과 맞먹는 3천7백17달러로 끌어 올렸다.

순더의 승승장구는 그러나 이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우선 중저가품 위주의 생산이라 기술경쟁력이 달린다. 순더 최고의 기업 커룽은 냉장고.에어컨에 관한 한 중국에서 독보적이다.

취재팀이 방문하자 커룽의 허빙쉬안(何炳煊)부사장은 "최근 3백ℓ급에 인공지능을 채택한 냉장고를 개발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중국에선 2백ℓ급이 주종인데다 인공지능형은 처음 개발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이미 보편화된 인공지능 냉장고가 커룽에선 창업 17년역사를 다시 쓰는 신기원이었던 셈이다.

커룽의 생산라인을 살펴보자 何부사장의 자랑이 이해가 갔다. 냉장고용 플라스틱 케이스는 너무 얇았고,외장재는 투박했다. 제품의 질이 좀 떨어지는 게 아니냐고 묻자 何부사장은 "중국 가전시장은 질보다 가격"이라며 "내수용은 싼 가격과 애프터서비스로 승부한다"고 말했다.

중국 내 과잉공급과 과당경쟁도 순더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요인이다. 어떤 품목이 잘된다 싶으면 새로운 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SMC관계자는 "천장선풍기 만드는 업체가 최근 2~3년사이 인근에만 40개 이상 늘어났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현재 순더의 가전기업은 3천개로 불어났다. 국내외 기업 누가 끼어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들만의 전쟁'도 버거워진 셈이다.

적자 국영기업을 떠넘기거나 과당경쟁을 부추기는 정부도 순더 기업들에겐 골칫거리다. 설립 이래 99년까지 흑자를 기록했던 커룽은 지난해 적자를 냈다. 98년 순더시가 커룽에 적자투성이 국영에어컨회사를 떠넘기고, 이어 정부가 시에서 추천한 인물을 보내는 등 참견이 많아지면서 이렇게 실적이 악화됐다는 것이다.

순더의 기업인들은 한결같이 "에어컨이 잘되면 정부가 에어컨공장을 차리고, 선풍기가 잘된다면 선풍기공장을 차렸다가 이렇게 만든 국영기업이 적자가 나면 다시 민간기업에 떠넘긴다"며 "정부는 이제 기업을 그냥 놔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재(경제연구소).남윤호(도쿄 특파원).양선희(산업부).정경민(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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