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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와이드] 낙안읍성 민속마을 옛 정취 간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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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21면

전남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그냥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살고 있는 냄새가 나는,민초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문 밖 큰 아들한테 갔다오며 동문 안 강생원 집에 들르니 일꾼들이 지붕을 새로 잇느라 정신이 없다.마당에선 서넛이 둘러앉아 볏짚으로 이엉을 엮고 윗채 지붕 위에서는 두엇이 용마름을 얹고 아랫채 위에선 묵은 이엉을 걷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전의 주막을 힐끗 들여다 보니 남문 밖에 사는 박서방이 혼자서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고 있다.동헌 앞 길에서 서당 훈장을 만났는데 얼른 망건을 고쳐 쓰고 반갑게 인사하며 손자를 다시 서당에 보내란다.다른 학동들은 매일 나와 열심히 글 공부를 한다면서…’

조선시대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순천 낙안읍성 안에서 반(半)백년 넘게 살고 있는 고흥댁(72 ·김맹덕)이 바로 엊그제 살아온 얘기다.

해발 5백m가 넘는 제석산 ·오봉산 ·금전산 ·백이산으로 동 ·서 ·북쪽이 에워 싸이고 남쪽만 조금 트인 분지에 자리잡은 낙안읍성.사적(史蹟)제302호로 지정된 총 6만7천여평의 성 안팎 모습은 우리가 살아왔던 그대로다.

길이 1천4백10m의 석성 안부터 살펴보자.4만1천여평의 성안에 68가구 2백여명이 사는데 주거지는 거의 다 초옥(草屋)들이다.네 가구만 슬레이트 지붕일 뿐이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누구 집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뒷간 지린내와 두엄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왠지 싫지만은 않아요.고향 냄새가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죠.”경남 진주에서 식구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김병환(42)씨는 말을 하면서도 코를 계속 실룩거렸다.

어깨 높이쯤되는 돌담,그 위에 말라 비틀어져가는 호박 넝쿨과 붉게 물들어가는 담쟁이 이파리들.고샅길을 따라 가다가 돌담 너머로 툇마루에 앉아있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눈 인사로 승낙을 얻고,대나무를 쪼개 엮은 사립짝을 살짝 열고 뜰 안으로 들어서니 옛 시골집 그대로다.

막 새로 이어 노오란 초가 지붕과 기둥에 매달아 놓은 종자용 옥수수 몇 개,처마 밑의 시레기 두름들,댓돌을 두른 토방,그 아래에서 졸고 있는 바둑이….

어느 집이나 뒤란이나 마당 한 켠에는 남새밭이 있어 배추 ·무 ·파 ·마늘이 푸르고,크고 작은 옹기들의 장독대 주위로 국화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다.그리고 그을은 굴뚝에서는 금방이라도 밥짓는 연기가 오를 것만 같다.

서문 안 송상수(50)씨 집에서는 큰 독을 묻고 판자를 걸친 뒷간을 쓰고 있다.송씨의 어머니 보성댁(75)은 “옛날엔 죄다 이러구 살았는디,인젠 귀경꺼리(구경거리)가 됐당게”라며 객(客)들을 맞았다.

동문 ·서문 ·남문에서 오는 길들이 만나는 성안 중심의 장터 음식점들도 옛정취로 발걸음을 잡는다.초가 지붕 처마 끝에 잇대어 쳐진 흰 광목 차일이 펄럭거리고 그 아래 평상마다 상(床)들이 놓여있다.차림 표도 소머리국밥·설렁탕·팥죽·빈대떡·동동주·막걸리 등 옛날 맛들이다.

민가촌(民家村)만 있었다면 낙안읍성이 외지인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동문과 서문을 잇는 큰길 너머는 고래등 같은 기와지붕의 관아(官衙)거리.낙안군 시절 군수가 집무하던 동헌(東軒)과 거처였던 내아(內衙),조정 사신들의 숙소였던 객사(客舍)들이 자리해 웅장한 전통 건축미도 보는 맛을 북돋아준다.

성밖 또한 성곽으로부터 50m 안은 사적지다.성곽 밑으로 25가구가 붙어서 초가 등 전래의 주거양식과 가깝게 살고 있다.

큰 돌들을 쌓고 작은 돌로 쐐기 박음한 높이 4m의 성곽.그 위로 난 너비 3∼4m의 길을 따라 성 안팎을 함께 내려다 보며 걸어 본다.상상의 나래까지 펼치면 과거로의 시간 여행,바로 그것을 체험할 수 있다.

순천시 박인수(50)낙안읍성관리사무소장은 “성문 안에 들어서면서 감탄사를 연발하고 ‘이런 데가 있었나’라며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며 “고향에 온 것 같이 아늑하고 어머니 품처럼 푸근한 느낌이 든다고 말들을 한다”고 밝혔다.

낙안읍성=이해석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 낙안읍성 민속마을

조선 태조 6년(1397년) 남쪽 8㎞의 순천만을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흙으로 쌓았다가 인조 4∼6년(1626∼28년)에 돌로 재축(再築)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끊긴 데가 없고,동 ·서 ·남 세 곳에 문이 있다.동문 ·남문 위엔 누각을 올리고,서문 ·남문은 바깥쪽으로 성문을 지키기 위한 옹성도 쌓았다.동남쪽 성곽 아래에는 방어시설인 해자(垓字·큰 도랑)를 둘러 파 놓았다.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등 세 동네로 구성됐고 1983년 사적 지정 전엔 약 2백가구 8백명이 살았다.지금은 91가구 2백61명이 살고 있다.

건물들은 관아(3동) ·누각(4동)을 빼곤 민가와 장터 난전,공중화장실,관리소 등이 거의 모두 초가(2백22동)다.

전기선 ·전화선은 땅속에 묻었고 TV안테나 역시 지하 공청선으로 처리했다.서당 ·도예공방 ·방앗간을 재현해 운영하고 목화밭도 만들어 놓았다.

양반이 아닌 서민들이 삶을 보고 느낄 수 있는데다 실제 사람이 살고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또 한동네(동족 부락)가 아니라 여러 동네로 이뤄지고 관아와 성이 함께 있어 행정·군사기능까지 가진 고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어 좋다.

동문 안에서 5대째 사는 송갑득(55)씨는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우리 낙안읍성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제주 성읍마을 ·고성 왕곡마을 ·아산 외암리 같은 민속마을이나 용인 ·제주 민속촌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 주민들은

낙안읍성 안팎은 국가 사적지로 개인 땅에도 마음대로 집을 지을 수 없고 기존 가옥도 임의로 뜯어 고치지 못한다.

장마철에는 볏짚 썩은 물이 떨어지고 굼벵이 ·노린재 ·빈대 같은 게 생겨난다.현대식 주거생활을 못하니 불편이 적지않다.

마을 안길부터 큰길까지 비포장 도로여서 먼지가 많고 비가 많이 내리면 질척거린다.

사생활 침해 역시 주민들의 큰 불편함이다.관광객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집안팎을 들락거리고 방안까지 기웃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직 ·간접적인 보상도 적지 않다.초가 지붕은 해마다 순천시가 비용을 전액 부담해 이어 준다.순천시는 읍성 입장료 수입의 40%를 주민들을 위해 쓰고 있다.

자녀 학비를 중 ·고생은 수에 관계 없이 전액,대학생은 두명까지 1인당 연 2백만원씩 대준 뒤 남은 돈을 집집마다 균등 분배(지난해 1백15만원씩)하는 식이다.

시 소유 음식점 네곳 등의 운영권 또한 주민 협의체(민속마을 보존회)가 가져 주민들이 1년씩 돌아가며 임대해 장사한다.임대료 수입으로 장례 50만원,입원 30만원,결혼·환갑 20만원씩의 경조비도 지급하고 나머지는 주민들이 나눠 갖는다.

보존회의 류삼기(60)사무장은 “5월 민속문화 축제나 10월 남도 음식문화 축제 때 누구나 이것저것 장사하고,영화 ·TV 촬영 때 집을 빌려주거나 엑스트라로 나서 돈을 받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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