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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12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127. 山門不出

성철 스님은 산승(山僧)으로 산을 떠나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 말년에 관절염으로 고생했기에 한겨울 추위를 피해 부산의 한 신도가 마련해준 처소로 피한(避寒)하는 것을 제외하면 산문(山門)을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산속에 칩거하는 성철 스님의 명성이 조금씩 세간에 알려지면서 큰스님을 세속으로 끌어내려는 요구 또한 적지않았다.

성철 스님이 종정의 자리에 오른 무렵인 1980년대 초반, 큰스님을 세속으로 끌어내려는 목소리는 '포교'차원에서 비롯됐다. 당시 개신교계는 부활절 같은 날을 맞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지곤 했다. 백만 단위의 인파가 모이는 기도회를 거의 매년 개최하는 것을 보고 불교계가 술렁거렸다.

"우리도 '부처님오신날'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법회를 갖자 ! "

일부의 목소리가 조계종 총무원의 입장으로 굳어졌다. 당시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나 예경실장(종정의 비서실장) 천제 스님이 몇차례 성철 스님을 뵙고 간청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산승(山僧)이 산에 있어야지, 어딜 간다 말이고 ! "

성철 스님의 입장을 꺽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종단 관계자들의 불만이 사라지진 않는다. 서울에서는 "시자(侍者.큰스님을 모시는 젊은 스님)가 시원찮아서 바깥의 상황을 잘 말씀드리지 못해서 그렇다"는 여론이 돌며 애꿎은 나에게 핀잔과 꾸중이 쏟아졌다. 그래서 내가 참다 못해 성철 스님께 건의했다.

"큰스님, 서울 여의도에서 법회를 크게 연다는데 한번 가입시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이놈아가…, 지가 가고 싶은 모양이제. 니나 가라. 나는 안간다."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워낙 대규모 법회에 대한 미련이 많아서인지 몇 해를 두고서 '부처님오신날'만 가까워지면 예의 '여의도 법회' 이야기가 꼭꼭 나왔다. 언젠가 성철 스님이 산문을 나서지 않는 마음의 일단을 밝혔다.

"내가 서울 간다고 사람 좀 마이 모이면 뭐 하노. 내가 서울 가는 거보다 산 지키고 여기 그냥 앉아 있는 게 불교에 더 이익이 되는 줄은 와 모르노."

성철 스님은 여의도에서 떡 벌어지게 큰 법회를 열고 설법을 하는 것보다 산중에 앉아 산승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 크게 봐서 불교의 위상을 높인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래서 결국 여의도 법회는 한번도 열리지 못했다.

그렇게 80년대가 끝나갈 무렵, 다시 성철 스님을 세속으로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87년 이후 민주화 운동의 열기다. 당시 성철 스님과 자주 비교된 종교지도자는 김수환 추기경이다. 시위 학생들이 명동 성당으로 몰려들고, 추기경이 이들을 끝까지 보호하며 지원하는 모습을 보고 불교계에서도 진보적인 성향의 젊은 스님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어려운 때 불교의 최고 어른이신 종정스님은 한 말씀하시지 않고 뭘 하고 계시는가 □ " 하는 원성과 비판이 자자했다. 그런저런 사정을 성철 스님께 여쭈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호통이다.

"내가 말 한 마디 한다고 세상이 바뀌나. 또 내 말을 들을 사람(정치 지도자)이 없는데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란 말이고."

이 때에도 성철 스님에 대한 원성과 비판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격동의 한 해가 지나고 새해가 되어 총무원장 등 중진 스님, 그리고 각종 불교단체장들이 신년하례(新年賀禮)를 위해 백련암에 올라왔다. 일행 중에 권익현(權翊鉉) 정각회(불교도 국회의원 모임)회장을 비롯한 국회의원 여럿이 포함돼 있었다. 성철 스님이 말했다.

"요새 자꾸 내 보고 민주주의 장사하라카는 거라 ! 민주화니 뭐니 하는 얘기가 여기까지 오는 거 보면 시끄럽기는 되게 시끄런갑제. 국회의원 여러분들, 생각해보소. 절집은 수행하는 데고, 국회의원은 정치하는 사람들 아이요. 서울 가거든 정치 잘 해갖고 인자 나보고 민주주의 장사하라는 말 안나오게 좀 해주소."

성철 스님은 그렇게 산중에서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살면서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과연 성철 스님이 불교계의 세과시나 이 땅의 민주화 운동에 얼마나 공헌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년의 세월이 흐른 뒤 큰스님이 가신 날 가야산을 찾은 수십만 추모인파를 보면서 생각했다. 큰스님은 산중에 앉아서도 넓은 세상을 비추었다고.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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