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미래가 보이는 마당] 글로컬리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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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글로벌리즘의 모델이고 보신탕은 로컬리즘의 상징이다. 월드컵과 보신탕 사이에 낀 한국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글로벌리즘이냐 로컬리즘이냐 하는 이자택일의 선택지를 넘어서 '글로컬리즘'의 통합적인 장을 마련하는 문화읽기와 문화만들기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그 가깝고 먼 거리를 재는 잣대에 따라서 애완동물과 가축과 야생동물을 나누는 경계에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개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서양의 문화 코드로 보면 개는 인간과 거의 동일시된다. 그러나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권 문화에서는 아무리 가까워도 인간과 개는 유별하다.

문화 코드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축구를 즐기는 것이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 더 야만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여러 스포츠 가운데 유독 축구만이 손을 쓰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손은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문명의 상징이 아닌가. 그리고 다 큰 어른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한사람(골 키퍼)을 괴롭히는 것도 잔학한 짓이 아닌가.

대만으로 후퇴해 온 국부군(國府軍)들은 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져 나오는 수도를 보고 놀랐다. 군인들은 신기한 그 수도꼭지를 사다가는 벽마다 박아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틀어도 물은 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속았다고 생각한 군인들은 철물점으로 쳐들어가 총질을 하며 난동을 부렸다. 우스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다가 그런 소동을 벌이는 수가 많다.

사람들은 땅 속의 수도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전구를 처음 발명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나가 에디슨이라고 쉽게 말한다. 일본 아이들이라면 그 전구에 쓴 대나무가 일본산이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그런데 막상 전구보다 몇 배나 더 중요한 발전소와 그 송전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같은 에디슨이 한 일인데도 말이다.

월드컵의 개고기 소동도 마찬가지다.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개고기를 먹는 행위를 중단시키라고 요구했고 한국 조직위원회는 "FIFA가 관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거부했다.

"왜 생선을 산 채로 회를 떠서 먹는 일본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는가? 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에는 말고기, 달팽이, 개구리 뒷다리 요리를 먹지 못하도록 조처하지 않았는가?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 기간에도 개고기를 먹는 13억 중국인을 향해 식단을 바꾸라고 말할 용기가 있는가"-한국인이라면 어느 외지의 논평처럼 그렇게 항의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응수로는 FIFA의 월권이나 약자 때리기의 비판은 될지언정 개고기를 먹는 데 대한 해명이나 정당화가 될 수는 없다.

교통법규를 위반한 운전자가 "당신에겐 단속 권한이 없다"라고 하거나, "왜 다른 차는 놔두고 나만 잡느냐"고 따지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잘못하다가는 수도꼭지 소동 같은 개싸움이 되고 만다. 이미 워너 브러더스 방송사와 뉴욕의 한인 사회 사이에서는 그런 분규가 일어나고 있다.

"한인 가게에서 개고기가 유통되고 있다"는 보도에 대하여 한국인 당사자는 그것이 개고기가 아니라 미국인도 먹는 코요테(여우와 비슷한 개과 동물)고기였으며 보신탕이 아니라 염소 보신 전골이었다고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왜곡보도라는 것이 밝혀진다 해도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의 식문화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서양 사람들이 있는 한 "창피해서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한국인 2세들의 고민은 가시지 않는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글로벌리즘의 모델이고 보신탕은 로컬리즘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그 잡음의 배경에는 문화 보편주의 대 문화 상대주의라는 거대 담론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이 개를 물다"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을 고발한 워너 브러더스는 서구문화를 월드시스템으로 삼고 있는 문화 보편주의의 창이다.

이에 비해 '한국인들은 월드컵 때문에 진미 요리를 포기해야 하는가'라고 묻고 "지금 한국에서는 남의 고유한 음식문화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에 대하여 서구의 문화 제국주의라는 반감이 확산되고 있다"고 논평한 독일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는 문화 상대주의의 방패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먹고 난 보신탕 그릇을 어떤 논리, 어떤 태도로 설거지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세계화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적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월드컵과 보신탕 사이에 낀 한국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글로벌리즘이냐 로컬리즘이냐 하는 이자택일의 선택지를 넘어서 '글로컬리즘'의 통합적인 장을 마련하는 문화읽기와 문화만들기이다.

개는 2,3만년 전 크로마뇽인 시절부터 인간과 가장 가깝게 지내온 동물이다. 폼페이의 유적에선 어린아이들을 보호하려다가 죽은 것으로 보이는 개의 유해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과 개가 함께 살아온 인류문화의 텃밭에서부터 서로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의 지명에는 개와 관련된 것이 무려 2천4백14개나 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는 술에 취한 주인을 산불에서 구하려다 숨진 의견(義犬)의 전설을 딴 '개목 고개'라는 것도 있다.

우선 이러한 정보를 세계의 이웃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그리고 정보에서 지식으로 단계를 높여 구조주의자들처럼 식문화에 숨어 있는 문화 코드를 찾아내 분석해야만 한다.

결혼과 식문화의 심층에는 "해가 너무 가까이 있으면 타죽고 너무 멀리 있으면 얼어 죽는다"는 원근금기(禁忌) 의식이 숨어 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끼리 하는 근친혼도, 이방인과 하는 외혼도 기피하는 것처럼 인간은 가까이에 있는 애완동물도 멀리 있는 야수(野獸)도 다같이 먹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이 대목이 중요하다) 그 대상이 얼마나 가깝고 먼가를 결정하는 잣대는 나라에 따라 다르고 문화권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한국에서는 동성만 되어도 결혼을 하지 못하는데 일본은 사촌끼리도 한다. 어디까지를 근친으로 보느냐의 문화적 코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그 가깝고 먼 거리를 재는 잣대에 따라서 애완동물과 가축과 야생동물을 나누는 경계에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개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서양의 문화 코드로 보면 개는 인간과 거의 동일시된다.

그러나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권 문화에서는 아무리 가까워도 인간과 개는 유별하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개가 방안에는 물론 침실공간으로까지 들어오지만 한국을 비롯한 유교문화권에서는 절대로 방 안으로 들이는 법이 없다.

한국에서도 방 안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와 금붕어같은 것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그것을 먹었다면 근친상간자처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한국의 개가 다른 가축과 같은 등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강아지 때에는 방 안에서 살 수도 있고 커서는 가축들이 범접할 수 없는 문간과 마당을 자유로 차지한다. 그러기 때문에 개고기의 금기 코드 역시 애매하고 느슨해서 먹을 수도 있고 먹지 못할 수도 있다.

서양의 문화 코드로 옮겨보면 한국의 개는 애완동물과 가축의 중간위치에 놓인다. 그래서 개고기는 쇠고기나 돼지고기와 차별화된다. 이같은 한국의 문화 코드를 모르는 서양 사람들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개고기를 먹고, 식당에서는 어디에서나 파는 줄로 오해하고 있다.

일정한 사람들이 일정한 시기(복중)에 일정한 식당(보신탕집)에서 파는 코드 일탈의 고기라는 사실을 안다면 한국인을 식인종 보듯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개고기를 견육이라고 하지 않고 구육(狗肉)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식용으로서의 개는 그 코드가 '견(犬)'이 아니라 '구(狗)'쪽으로 기울 때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인이 주로 먹는 황구(黃狗)는 서양인이 생각하는 애완용 개의 컨셉트와는 다른 것이다.

거기에 다시 근대화가 되면서 문화 코드가 달라지고 푸들이나 치와와처럼 실내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월드컵이 아니라도 업그레이드된 한국의 개들은 복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개의 코드 강화로 이제는 남의 간섭 없이도 개고기는 혐오식으로 기피되어 그것을 먹는 인구도 줄어든다.

이러한 문화 코드를 읽을 줄 알면 월드컵을 같이 치르는 일본이 왜 개고기를 먹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풀린다. 근대화를 먼저 해서가 아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불교문화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메이지(明治)유신 전까지는 개만이 아니라 네발 달린 짐승 고기는 모두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동물 애련의 법'까지 만든 도쿠가와 쓰네요시(德川網吉)의 5대 장군은 자기와 띠가 같은 개에 대하여 특별히 단속이 심하여 몰래 버린 개의 숫자가 5만 마리에 이르기도 했다.

개고기만이 아니다. 문화 코드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축구를 즐기는 것이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 더 야만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여러 스포츠 가운데 유독 축구만이 손을 쓰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손은 동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문명의 상징이 아닌가.

그리고 다 큰 어른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면서 한사람(골 키퍼)을 괴롭히는 것도 잔학한 짓이 아닌가. 무법천지의 훌리건 역시 다른 스포츠 관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야만이 아닌가.

심지어 포드 대통령이 상식에 위배되는 실언을 했을 때 대학시절의 축구 경력을 들먹여 헤딩을 많이 해서 머리가 그런 것이 아니냐고 비꼰 정적들도 있었다. 그러나 축구의 문화 코드를 심층적으로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결코 그런 무지한 발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와일드한 축구가 오히려 인간 문명에 새로운 활력을 일으키는 카니발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개방이 집 문을 여는 국제화였다면 21세기의 그것은 집의 담을 허무는 세계화이다. 월드컵이 세계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보신탕 뚝배기는 그 담을 상징하는 문화 코드이다. 수도꼭지같이 문화를 단말적인 것으로 보면 그것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숨어 있는 심층적인 코드로 해독하면 문화의 보편성과 상대성은 하나의 고리로 이어지고 글로벌과 로컬이 어울리는 '글로컬리즘'이 생겨나게 된다. 월드컵과 보신탕 뚝배기는 미래의 우리 모습을 비춰주는 수정구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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