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그들만의 노동운동 함께 사는 노동운동] 하. "노동자에 득 되는게 진짜 노동운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 일본 알박그룹 나카무라 회장(中)과 손학규 경기도지사(左), 이화수 한국노총 경기도본부의장이 지난 9월 투자협정서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경기도 제공]

"친절이 생명인 곳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소 하나에 감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 매일 최선을 다하는 저희를 기억해 주십시오."

서비스 업종의 회사 종업원이 고객을 상대로 할 법한 말이다. 그런데 한국노총 경기도본부에 전화(031-267-3003)를 하면 전화기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이런 말이 흘러나온다.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를 행진하며, 구호를 외치던 노조의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노조가 대(對)노동자, 대국민 서비스에 나선 것이다. 이들처럼 지역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노조가 늘어가고 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외국 기업이 들어와 일자리를 만들고, 노동자들의 고용도 안정되고 있다. 상급단체의 지침이나 회사를 상대로 한 강경투쟁은 이들에게 더 이상 최대 관심사가 아니다. 이들은 기업이 있어야 노동자가 있고, 노조도 산다는 생각을 한다. 노사 상생의 첨병으로 나선 것이다.

◆ 노조 때문에 살 맛나는 경기도=지난 9월 2일 이화수 한국노총 경기도본부 의장은 미국과 일본을 찾았다. 손학규 경기도지사와 지역 경제인들이 동행했다. 그는 노사분규와 과격한 노조를 걱정하는 외국 기업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회사를 한국에 설립한다면 한국노총 차원에서 파업 등 각종 분규를 자제하겠다."

이런 모습에 감명받은 일본 알박그룹 나카무라 회장은 "일본 자치단체장에게도 노총 사람들과 함께 외국으로 나가라고 적극 권해야겠다"고 말했다. 올 들어 이 의장과 함께 세 차례 외국 투자유치에 나선 경기도는 미국 델파이사.3M, 일본의 히타치금속.알박그룹 등으로부터 지금까지 46건에 16억4600만달러의 외자를 유치했다. 경기도는 "1만여명의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전망했다.

24년간 노동운동을 하는 동안 강성으로 통했던 이 의장은 "시대가 바뀐 만큼 실질적으로 노동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외국 기업의 투자로 일자리가 늘지만 첨단 핵심기술을 배울 수도 있어 자연스럽게 기술이전이 되니 노조로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노총 전남 광양지부는 이미 9년 전부터 매년 5월이면 어김없이 노.사.정이 참여하는 산업평화선언대회를 열고 있다. 이를 위해 지부는 매년 1월 지부 내 단위노조 위원장을 소집해 무파업 결의를 다진다.

올해 3월에는 광양지부 소속 노조원과 시청 직원, 지역경제인이 함께 중국 상하이를 찾아 선사(船社)인 시노트랜스로부터 광양항 추가 기항 약속을 받아내는 등 200만달러 규모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노사분규 없는 항만으로 육성하겠다"며 노조 관계자들이 설득한 결과였다. 지금은 일본 기업과도 접촉 중이다.

◆ 적대관계에서 동반자로=1999년 63일간 파업 등 연평균 22일 파업. 지난해 상반기 수주실적 0원. 이렇게 주저앉았던 두산중공업이 올 들어 중동의 담수플랜트사업을 싹쓸이했다. 올해에만 무려 4조7000여억원의 수주실적을 올렸다.

김종세 부사장은 "해외 수주 경쟁에서 회사의 기술력과 함께 노사 안정이 최대의 무기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두산중공업은 수주 경쟁에 나설 때마다 일본과 유럽의 경쟁 회사들이 "두산은 분규가 심해 납기를 못 맞출 것"이라는 흑색선전을 하는 바람에 번번이 쓴맛을 봤다.

지난해 초 이 회사 직원 배달호씨의 자살로 촉발된 노사분규가 정부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이슈로 번지고 장기화되면서 빚어진 여파였다. 2002년에는 15억달러의 발전시설 건조를 두산중공업에 맡겼던 GE가 노사 분규를 견디지 못하고 계약을 파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두산중공업 노사는 민영화(2001년) 이래 처음으로 임단협을 무분규로 타결했다. '노사협력 및 고용보장 협정'까지 체결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단 한 건의 분규도 없었다. 이런 노사 안정의 배경에는 역시 노조의 변화가 있었다.

지난해 하반기에 노조는 3000여명에 달하는 구조조정에 전격적으로 합의했다. 올해는 상급단체인 금속노조의 지침이었던 '근로조건 저하 없는 주5일 근무제 도입' 요구를 접고, 개정된 근로기준법에 따라 주5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물론 산별노조의 상급단체로서 교섭체결권을 가지고 있는 금속노조는 노조지회장을 징계위에 회부하거나 교섭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며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강대균 두산중공업 노조지회장은 "대책도 대안도 없이 이상만 가지고 조합원을 불구덩이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강 지회장의 방침에 동조한 노조원들 사이에선 금속노조를 탈퇴하자는 목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이 회사 정석균 전무는 "노조가 현실적으로 보고 상생의 결단을 내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기찬 기자

*** 현재 노사정은…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거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이런 것을 하기로 했으니 정부는 이런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모습들을 노사정위원회에서 자주 봐야 한다. 사회적 대화는 노사와 국가가 모두 상생하는 길이다."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은 개별 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으로는 노동자 전체의 권익을 더 이상 키우기 어렵다고 말한다. 노사와 정부가 모여 임금과 근로조건을 벗어나 노동자의 생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제도와 국가정책에 관련된 문제까지 폭넓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선 이 같은 사회적 대화가 정착돼 있다.

네덜란드.스페인 등은 노사정 협의기구가 법적으로 제도화돼 있다. 독일.이탈리아는 별도의 상설기구는 없지만 노사정이 수시로 당면 현안을 놓고 정책협약을 맺는다.

우리나라도 노사정위원회라는 사회적 대화기구가 있다. 1998년 출범한 노사정위는 당시 외환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2기 노사정위까지 참여했던 민주노총이 99년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에 반발해 탈퇴하면서 노사정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노사정위는 한국노총이 노동계를 대표하며 올 2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협약'을 맺는 등 여러 합의를 이끌어내긴 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빠져 있어 '반쪽'짜리 합의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제조업 공동화 등 개별 사업장에서 풀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노동계 전체가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노사정위 김훈 수석전문위원은 "업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구조개혁이나 정책을 추진할 때 실효성을 높이려면 노사정 간 충분한 대화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정철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