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 보신탕과 문화적 예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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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사람은 누구나 어떤 문화 공동체 속에서 산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살 듯이 말이다.

개인의 자유는 문화에 저항하고 문화와 타협한다. 명리론(命理論)에 죽은 고기는 물을 따라 흐르고 산 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친다는 말이 있지만,살아 있다고 마냥 물을 거스르기만 하다가는 미구에 지쳐서 죽은 고기가 될 수도 있다. 문화 자체도 더 넓은 문화 속에서는 한 마리의 물고기와 같다.

글로벌화한 세상인지라 한 문화는 전보다 훨씬 빈번하게 다른 문화와 접촉한다. 한꺼번에 여러 문화 속에 살게 되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내년 월드컵 때 한국은 또 한번 여러 문화를 손님으로 맞을 것이다. 손님 가운데는 한국 문화에서 보신탕을 제거하라고 압력을 넣는 세력도 있다. 이런 때의 문화적 예의를 말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 한국 안에도 혐오파 다수

편의상 문화를 주인의 문화와 손님의 문화, 강자의 문화와 약자의 문화, 배타적인 문화와 포용적인 문화, 이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고자 한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배타적인 약자의 문화로 보인다. 한국 문화는 한국 땅 안에서는 주인이다. 미국 문화는 미국 땅 밖에서도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미국 문화는 강자의 문화다. 석가와 예수가 포교한 원시 불교와 원시 기독교는 약자 문화였다.

한국 안에도 열렬한 보신탕 혐오파가 있고 그 숫자는 보신탕 먹는 쪽을 크게 웃돈다. 그러나 이들도 포용적이고 약자적인 한국 문화 속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인구 전체를 모집단으로 잡는다면 지난 한 해 동안에 보신탕을 한 번이라도 먹었을 한국인은 10%에도 못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나만 안먹으면 되지 먹는 사람을 구태여 공격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나온 것은 기근 때문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1960년대 이전에는 주로 가난한 사람이 보신탕을 먹었다. 그러다가 경제개발 시기에 접어들자 전환기의 문화적 광기의 일종이었던지 별별 것에 정력강장제라는 이름을 달아 주고, 정력강장제라면 아무거나 먹는 열풍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한국의 음식 문화에서 개고기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됐다.

요새는 보신탕이 가장 비싼 음식 가운데 하나가 됐다. 값 때문에도 보신탕 집을 찾는 손님이 엄청 줄었다. 스태미나 음식에 대한 열풍이 식은 지도 오래다. 이제는 매우 예외적인 소수의 미식 사냥꾼들이 이 비싼 음식을 찾는 꾸준한 손님이 됐다. 국내의 반(反)보신탕주의자들은 이런 사정을 알고 이 미미해진 음식에 대해 모른 척하기를 지나 잊어가고 있는 것 같다.

중화주의에다 마르크시즘까지 가중된 중국의 강자 문화로부터 문화적 핍박을 받고 있는 티베트 사람들은 중국인을 미워하기보다는 멸시하거나 가련하게 여긴다. 그 이유를 들으면 엉뚱하게도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먹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세계에서 티베트보다 더 열렬한 보신탕 혐오 문화는 없을 것이다.

나는 티베트 문화권인 부탄에서 1년 남짓 산 일이 있다. 자기들끼리는 개고기 먹는 중국인 흉보는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도 한국인이, 그리고 내가 개고기를 먹는지를 내게 물어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내 쪽에서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것이 손님과 주인 사이의 문화적 예의다.

자기 문화의 금기나 엄수 사항을 상대방 문화에서는 훼손을 방임하는지 혹은 나아가 권장하는지에 관해서는 직접 묻는 것조차 삼가는 절제가 문화적 예의의 핵심이다. 한마디로 모른 척하는 것이다. 진정한 문화적 다원주의는 강자와 약자, 주인과 손님이 같이 이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포용적인 문화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배타적인 문화에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걱정이다.

*** 주인 ·손님 모두 참았으면

인간의 생명이나 자유를 핍박하는 것만은 이런 문화적 예의를 적용할 대상이 아니다. 폭군들은 인간의 생명이나 자유의 유린을 문화적 다원주의(상대주의)를 이유로 변명한다. 굳이 여기에도 문화라는 말을 쓰려면 그 때는 인권은 어떤 문화에서도 존중돼야 한다는 문화적 보편주의를 적용할 수밖에 없다.

보신탕 먹는 것이 인권의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예의가 좀 없는 손님이 보신탕을 두고 우리를 욕 보이려는 일이 생기면 그들이 머무르는 동안 꾹 참고 모른 척하고 지나는 것이 주인의 예의일 것이다.거기서 좀더 참으면 오래잖아 손님.약자.포용 문화가 주도하는 세상이 올 것으로 보인다.

강위석 <월간 emerge새천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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