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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일본관객 압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우리의 뮤지컬이 일본을 한 수 가르쳤다.일본의 뮤지컬이 잃어버린 폭발하는 에너지와 역동적인 힘, 그리고 저항정신 말이다.

극단 학전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제작.연출 김민기)의 일본 공연은 이곳 관객들에게는 하나의 문화충격이었다.

지난 15일 오후 7시 개막공연이 열린 시부야 분카무라(文化村)의 시어터 코쿤. 8백여명의 만원 관객들은 '지하철 1호선'의 그런 힘에 압도돼 시종 힘찬 박수로 화답했다. "감정 표현이 인색한 일본인들에게 지속적인 박수는 극히 예외적인 반응"이라고 한 교포 관객이 귀띔했다.

막이 열리자 강렬한 라이브 록음악 연주와 함께 등장한 주인공 선녀(이미옥)의 열창은 관객의 시선을 동여맸다. "여섯시 구분 서울역. 새벽이 이 낯선 도시를 깨우네." 선녀의 노래는 마치 서양 뮤지컬의 모방에 찌든 이 '낯선 도시(도쿄)'를 깨우는 진한 메아리가 돼 울려퍼지는 듯했다.

이어 줄줄이 등장하는 걸레(방주란).안경(권형준).곰보할매(김효숙).빨간바지(이지은).포인터(최무열).땅쇠(이황의) 등. 이런 군상들이 비틀어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야유는 일본 뮤지컬에서쉽게 발견할 수 없는 신선함 그 자체였다.

이런 감상이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 '실험극의 대부' 가라주로(唐十郞)가 확인해 주었다. "지금까지 일본의 뮤지컬은 어떻게 아름답게, 혹은 보기 좋게 보여주느냐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저 픽션의 세계에서 허우적댔다. 그러나 '지하철 1호선'은 현실적이고 도전적이었다." 그는 1960~70년대 야외극 스타일의 '검은 텐트' 극단을 이끌며 일대를 풍미한 인물이다.

얼치기 민중가수 안경이 부르는 '서울의 노래'는 가장 극적인 모멘트였다. "서울, 하늘 아래 단 한 곳 뿐인 곳. 사방이 온통 남쪽뿐인 이상한 도시." 이 노래는 '아침이슬' 김민기의 음악적 스타일과 사상이 응축된 대표적인 곡이다.

가라주로는 "일본 사람들에게 이처럼 자기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문제점에 대해 욕하고 비난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노래로 표현된 극적 상상력의 최고 대목"이라고 극찬했다.

그동안 일본 관객들은 현실보다는 픽션의 세계에 익숙했던 탓인지 '지하철 1호선'의 희극적 표현 방식에 훨씬 빠른 반응을 보였다. 가장 인기를 끈 배우는 최무열이었다. 30년 전 개발독재시대의 향수병에 걸린 '강남의 과부 사모님' 장면에서 뚱뚱이 최무열의 코믹한 연기는 단연 웃음거리였다.

일본의 저명한 연극평론가인 시즈오카문화예술대 센다 아키히코(扇田昭彦) 교수는 "한국의 배우들은 일본 배우들보다 훨씬 음악에 대한 이해와 적응력이 뛰어나다"며 "보는 사람의 마음 속까지 파고드는 울림과 기교가 있다"고 평가했다.

'지하철 1호선'은 첫날의 이런 반응에 힘입어 도쿄의 다섯차례 공연에서 모두 만석을 기록했다. 일본 유수의 도큐(東急) 그룹이 90년대 초 만든 분카무라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특급 공연장. 이런 이점에다, 쉬우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일본어 자막도 효과적이어서 '지하철 1호선'의 도쿄 공략은 무결점의 성공이었다.

김민기씨는 "서양 것을 주체적으로 자기화한 것에 일본 관객들이 후한 점수를 준 것 같다"고 흡족해 했다. 이번 공연은 일본의 국제교류기금(재팬 파운데이션)이 공연비용과 개런티.저작권료 등 일체를 부담한 예술품 수출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도쿄에 이어 20일 오사카(21일까지)에서도 열띤 반응을 이끌어 냈으며, 24.25일엔 후쿠오카에서도 공연한다.

도쿄=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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