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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7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그 천기를 김양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으리, 이제 대왕마마께오서는 무려 백오십인의 도승을 허락하실 정도로 깊은 병 중에 계시나이다. 뿐만 아니라 대왕마마께오서는 연로까지 하시나이다."

김양의 말은 사실이었다.

흥덕대왕 능비 단석에 '수육십시일야(壽六十是日也)'라는 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흥덕대왕은 60세의 나이에 죽었으며, 따라서 그는 50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김양의 말대로 그 무렵 대왕은 연로하여 55세의 나이였던 것이다.

"더욱이 대왕마마께오서는 황후마마께오서 돌아가신 후 홀로 사셨나이다. 심지어 시녀까지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에 관한 기록 역시 사기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또한 시녀에게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좌우사령(左右使令)에는 오직 고자가 있어 할뿐이었다."

김양은 말을 이었다.

"따라서 대왕마마께오서 대를 이을 후사가 없으심은 온 조정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나이다. 그렇나이다, 나으리. 대왕마마께오서는 연로하시고, 병중에 계시옵고, 게다가 후사가 없으셔서 언제라도 갑자기 붕이라도 하시게 되면 온 나라가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이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김우징이 소리 쳐 말하였다.

"네 이놈. 네놈의 모가지를 당장에라도 베어버릴 것이다."

김우징은 한 곁에 놔두었던 칼을 집어 들었다. 만일의 사태를 예비해서 칼 한자루는 비상용으로 준비해 두고 있던 김우징이었다. 김우징은 칼을 빼어 김양의 얼굴에 정면으로 들이대었다.

"네놈의 몸속에 요사스런 피가 흐르고 있음을 내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이제 보니 바로 네놈이 반적이로구나. 내 너를 참하고 말 것이다."

김우징이 분개하여 몸을 떨며 소리쳤지만 김양은 낯빛하나 변하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있을 뿐이었다.

"나으리."

김양은 날카로운 칼이 자신의 정수리를 겨누고 있었으나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으리께서 신의 목을 베시든, 신의 혓바닥을 자르시든, 나으리를 향한 신의 단심은 변함이 없나이다. 나으리, 천기라 할지라도 샐 곳은 있으며, 천지조화라 하더라도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나이다. 나으리, 어느 날 갑자기 대왕마마께오서 붕하신다면 그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만일에 사태를 미리 대비해두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나이까. 신의 목을 벤다고 하더라도, 신의 혓바닥을 잘라낸다 하더라도 천지는 반드시 개벽될 것이나이다."

"칼을 치우라."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균정이 짧게 말했다. 그러자 김우징이 칼을 거뒀다.

"더 이상 내 앞에서 칼을 빼어들지 마라. 더 이상 칼에 피를 묻히지 않을 것을 맹세한 애비가 아니더냐."

김균정은 직접 반란의 토벌에 나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어두운 과거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날아온 화살에 어깨를 다쳐 왼손을 자유롭게 사용치 못하는 부상을 입고 있었던 것이었다.

"…계속해 보아라, 위흔아."

김균정은 다정한 소리로 김양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대왕마마께오서 깊은 병 중에 계신 것도 사실이고, 연로하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김충공 상대등께오서 남아 계시지 않겠느냐."

김균정의 말은 의미심장하였다. 흥덕대왕이 깊은 병중에 있고, 연로한 것도 사실이어서 언제라도 돌아가실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지만 그 대신 후사로서 대왕의 친동생인 김충공이 남아있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이에 김양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나으리."

김양은 김균정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말을 뱉었다.

"상대등 나으리께오서도 이미 연로하셨나이다."

김양의 말 역시 사실이다. 그 무렵 흥덕대왕이 55세 나이라면 그의 동생 김충공 역시 50세가 넘는 고령이었던 것이다.

"하오나 나으리는 충분히 젊으시나이다."

김양은 은근히 말하였다. 그 말은 은연 중에 제1의 권력서열인 상대등 김충공보다 제2의 권력서열인 김균정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음을 암시하는 언중유골이었던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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