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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백수광부' 창단 다섯 돌 맞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3면

1990년대에 만들어진 극단 중 ‘백수광부’는 자기세계가 가장 뚜렷한 집단이다.

극단명은 고대시가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이 범상치 않은 이름 만큼이나 운영시스템과 작품의 색깔 등이 타 극단과 비교된다.

올해 백수광부의 나이는 다섯살이다. 96년 연세대 극예술연구회 출신의 이성열(39)씨가 극단 산울림에서 독립하면서 만들었다. 임영웅씨 밑에서 쌓은 조연출 7년간의 '내공'이 첫 작품에서부터 폭발했다. '햄버거에 대한 명상'. 장정일의 시를 바탕으로 시와 영상, 연극의 만남을 시도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그로부터 만 5년 뒤 열번째 정기공연이 현재 연우소극장 무대에서 열리고 있다. 윤영선 작.연출의 '파티'(12월 2일까지, 02-766-1482)다. 98년 예술의전당 '우리시대의 연극' 기획공연으로 첫선을 보여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당시는 이씨가 연출했다.

'파티'는 한 시골 전원주택에 갑자기 들이닥친 틈입(闖入)자들의 이야기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빚어지는 질서의 역전현상을 통해 이성.합리성을 앞세운 근대 신화의 덧없음을 역설한다. 이런 묵직한 주제에 비해 '공포 코믹'의 전개방식은 발랄하고 재치있어 젊은 관객들로 극장은 늘 만원이다.

"독립 당시 나는 나만의 색깔있는 연극을 하고 싶었다. 실험정신은 그 '색깔'의 밑바탕이었다. 다양한 연출법을 시도하다 보니 '너무 변동이 심하다''하나의 목표만 추구하라'는 주문도 있으나 내 방식을 후회하진 않는다. "

비록 이씨의 연출작이 아니더라도 지금껏 공연한 백수광부의 레퍼토리는 대부분 '경쾌한 실험성'이라는 말로 수렴된다. 지금의 '파티'와 극단의 최대 성공작이랄 수 있는 '키스'(97년), '굿모닝? 체홉'(98년), '고래가 사는 어항'(2000년) 등이 대표적이다.

때로는 사실주의적이면서도 격렬한 해체(解體)가 엿보이는 역동적인 무대는 백수광부를 '작가주의적 극단'의 한 모델로 자리잡는 동력 구실을 했다.

"내게 실험이라는 의미는 '연극성(性)'을 회복하려는 몸부림과 동의어다. 아직도 유령처럼 떠도는 '연극위기론'은 연극 그 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회복하고 싶었다. 그런 수단으로 이미지와 무용.영상.아크로바트 등을 많이 활용했는데, 그런 수법들이 젊은 관객들에겐 신선한 느낌을 준 것 같다. "

그러면서도 이씨는 항상 '현대인의 삶'을 탐색한다. 먼지를 뒤집어 쓴 안톱 체호프의 '세자매'(2001년)도 그의 손을 거치면 명료한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생기있게 변한다. 80년대의 투사(鬪士)의 삶을 오늘의 일상과 병치시킨, 얼마 전 끝난 '불티나'도 그런 경우다. 바로 지금 우리의 일상을 지금의 연극언어와 감수성으로 풀어내는 작품, 그게 백수광부의 리더 이씨의 연극 컬러다.

작품 외적으로 봐도 백수광부는 '특이한' 집단이다. 연극사적으로 극단 형태는 동인제(60~70년대)-1인 독재시대(80년대, 오태석.이윤택의 경우)-집단합의체(90년대, 극단 작은신화)로 변모를 거듭했다. 백수광부는 작은신화에 이어 90년대 말 집단합의체의 맥을 잇고 있다.

"창단 멤버의 반 이상이 바뀌었지만, 연극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성공과 실패에 공동책임을 지는 식으로 극단을 이끌었다. 뜻이 맞으니 혹독한 신체훈련도, 내핍의 생활도 달갑게 견딜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작품의 질을 고르게 유지할 수 있었다."

백수광부의 실력이 검증되면서 지난해부터는 외부 지원금도 딸 수 있었다. 그래서 제작비 3천만~4천만원의 '중급' 규모 공연도 할 수 있게 됐다. 이씨는 "앞으로 소극장을 탈피한 중.대극장 무대도 생각하고 있다"며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고 말했다. 백수광부의 미래가 기대된다.

정재왈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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