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여성 정치참여를 늘리려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민주사회의 질서를 위해 국가가 제정한 각종 법률들이 상황 변천에 따라 오히려 질서의 독소조항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 여성들이 성차별적 사회통념과 관행들을 타파하고 법제도를 개선, 헌법이 보장하는 바 평등한 권리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제안을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 중에서도 선거법을 비롯한 정치관계법의 개정은 여성에게 절박한 당면과제다.

대의제는 사회의 팽창, 다양화에 따른 필연적 원리다. 따라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제도에서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폐해를 입게 되는 조항이 있고, 나아가 절차의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지난 7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현행 선거법(제56,57,146,189조)에 대한 위헌 판결은 제헌 헌법에서 명시한 기본권을 살려내는 근원적인 조치로서 우리 사회에 헌법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상쾌한 소식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입법부의 후속조치는 감감소식이다.

군사독재 시절부터 국민을 정치의 도구로 삼아 왔던 선거제도를 민주화를 완성했다는 국민의 정부마저 개정을 서두르지 않고 있어 유감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비례대표제.선거구 획정 등의 골격이 자칫하다간 남성 주조의 국회에서 각 당의 이해에 따라 임시방편적 타협으로 흐를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남녀동등법안이나 서구 국가들의 여성 정치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은 남성 중심적이고 백인 중심적이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좁혀질 수 없을 만큼 벌어진 남녀 불평등의 갭을 인위적으로 좁혀 공정한 경주를 하기 위한 시발 조치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여성을 배제하고 온갖 전횡을 일삼은 남성만의 정치문화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지난 10월 30일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평등권 실현을 위해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정치관계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 골자는 유권자의 선택권 보장,여성 및 소외계층의 정치참여 활성화를 위한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 각종 선거 기탁금 인하, 승자 전취식 소선거구제의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 선거공영제의 확대 및 여성정치참여 활성화 기금 설치, 여성단체의 선거운동 기간 중 정치참여 허용, 여성 공천 할당제 엄중 실시 요구 등이다.

이는 주로 현행 법안 중 유권자의 평등권을 침해하고 여성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조항들에 대한 개정 요구다. 입법.행정부가 뒷짐을 지고 있음에도 민간 단체가 국회에 법률을 제안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여성의 정치참여는 헌법정신에 근거한 민주주의 평등성 회복 차원뿐 아니라 지식정보화 시대의 큰 흐름인 변혁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절박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법체계는 구성원의 족쇄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번 법 개정이 반드시 이뤄져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열망한다.

은방희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