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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열강에 시달리면서도 조선 지배 야욕 못 버린 이홍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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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896년 영국 방문 중 솔즈베리 총리(왼쪽)와 함께한 73세의 이홍장(李鴻章·1823~1901). 그는 청일전쟁 패배 이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권력자가 아닌, 평화를 호소하는 외교사절로 서구열강을 순방했다.

태평천국의 난(1851~64)을 진압하며 한족 출신으로 만주족 황제 다음 자리에 오른 이홍장. 1870년 이후 수도 베이징을 다스리는 직예(直隸) 총독에다 톈진 앞바다를 지키는 북양(北洋)대신 직을 함께 맡은 그의 두 어깨에는 왕조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 지워졌다. 베이징조약(1860)으로 연해주를 갖게 된 러시아가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포함을 동원한 일본의 무력시위로 조선이 개항(1876)하자 그는 조선이 이 두 나라에 먹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한반도는 인체에 비기자면 잃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다리 격인 중국 남부 지역보다 졸리면 숨이 끊기는 목구멍과 같은 전략적 요충이었다.

특히 1879년 일본이 류큐(琉球·오키나와) 왕국을 병합하고 신장(新疆)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러·일이 한반도를 삼킬지도 모른다는 그의 위기의식은 불타올랐다. “조선은 스스로 독자적인 대책을 수립할 수 없으므로 조선을 위해 대신 주책(籌策)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청나라에 조선은 ‘내치와 외교’에 있어 간섭을 받지 않던 ‘자주지방(自主之邦)’이 아니었다. 그해 8월 청나라 조정은 그에게 조선 정부에 서구와의 입약을 권도하라고 명했다. “일본을 제어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술책이 없고, 러시아의 침략을 방비하는 데도 이보다 더 좋은 계책이 없다.” 그가 짜낸 묘책은 서구열강과 조약을 체결하고 통상을 통해 경제적 이권을 보장해줌으로써 러·일 두 세력의 침투를 막는 방패로 삼으라고 권하는 ‘열국입약권도책(列國立約權導策)’이었다. 그의 “독으로 독을 공격하고 적으로 적을 막는(以毒攻毒 以敵制敵)” 이이제이(以夷制夷) 책략은 1882년 여름에 맺어진 조선과 미·영·독 사이의 수호통상조약에서 실현됐다. 그러나 그해 8월 임오군란이 터지자 그는 조선의 생존을 돕는 조언자라는 가면을 벗었다.

일방적으로 서울에 진주한 3000명의 군대는 청나라가 제국주의 열강의 흉내를 내는 침략자로 변신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어찌 보면 1860년대 이후 중국은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는 처지이면서도 신장 지역을 놓고 러시아와, 류큐와 조선을 두고 일본과, 베트남을 갖고 프랑스와 패권을 다툰 부차적 제국주의(secondary imperialism) 국가였다. 대국굴기(大國崛起)를 외치며 중국이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지금, 북한과 중국이 지난 5일 ‘내정과 외교상의 중대 문제, 국제사회·지역의 형세 등 공통 관심사에 대해 전략적인 의사소통을 강화해 나가기로 합의했다’는 보도는 한 세기 전 아픈 기억을 다시금 곱씹게 만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