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릿수 환율 시대' 현실화 되면…] 중소 수출기업 국내선 못버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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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릿수 환율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일본 엔화 환율이 달러당 100엔선 붕괴를 눈앞에 두면서 원화 환율도 머지않아 다시 세 자릿수 시대로 접어들 공산이 커졌다. 과거 달러당 700~900원일 때보다 경제 규모가 월등히 커져 환율 하락의 충격을 흡수할 여지도 그만큼 넓어졌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기업.사람.돈의 이동이 완전 자유화돼 세 자릿수 환율시대가 경제에 미칠 충격은 과거보다 훨씬 커진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세계적인 달러 약세 기조를 한국 정부의 힘으로 되돌릴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이 시대에 대비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 달라진 경제 여건=최근 세계적인 달러 약세 기조는 1985년 프랑스.독일.일본.미국.영국 등 선진 5개국이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한 플라자 합의 직후와 유사하다. 비록 지금은 플라자 합의와 같은 명시적인 합의는 없지만 미국과 일본.유럽연합(EU)은 달러 약세 기조에 큰 이견이 없다.

80년대 후반과 비교해볼 때 한국 경제의 덩치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국내총생산(GDP)은 86년 1076억달러에서 지난해 6052억달러로 6배 가까이 됐다. 외환보유액도 80억달러에서 1861억달러로 23배 불어났다. 금리는 10%대에서 4%대로 떨어졌다. 그만큼 환율 충격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길렀다.

그러나 환율이 경제에 미치는 충격도 커졌다. 무엇보다 당시엔 국내 환율이 복수통화바스켓제도에 따라 사실상 정부가 정했다. 이 때문에 엔화가 85~88년 46% 절상될 때 원화는 16%밖에 오르지 않았다. 달러 약세에도 불구하고 원화 값은 엔화에 대해 오히려 떨어졌다.

이에 따라 미국에 수출하는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일본 제품보다 높아졌다.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약세가 한국에는 수출 호기가 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금은 원화 환율이 완전 자유화됐다. 엔화 가치가 높아지면 원화도 비슷한 폭만큼 절상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달러 약세의 충격은 국내 외환시장에 바로 반영된다는 것이다. 자본과 기업.사람의 이동도 자유화됐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80년대와 달리 지금은 정부가 환율을 인위적으로 규제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정부만 믿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며 "각 경제주체가 알아서 환위험에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중소 수출기업 타격=대기업은 80년대 환율 절상을 경험한 이후 환율 변동위험에 대비해 왔다. 예컨대 삼성전자 가전제품의 경우 올해 해외 생산비중이 물량 기준으로 80%에 달한다. 이 때문에 원화 환율 변동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게다가 미국에 의존하던 수출 비중도 지역별로 다변화했다. 현대차의 경우 과거 세 자릿수 환율대에 60% 이상이던 미국 수출 비중을 42%까지 낮췄다. 환율이 다시 세 자릿수로 가더라도 대기업은 어느 정도 버틸 여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치명적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국내 수출기업의 적정 환율은 평균 1174원으로 조사됐다. 손익분기점 환율도 1127원이다. 대기업을 제외한다면 적정환율은 더 높아진다. 최근 환율 급락으로 70% 이상 기업이 적자 수출에 직면했다는 게 무역협회의 분석이다.

무역협회의 조사가 기업에 대한 설문으로 이뤄지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달러당 1000원 아래로 환율이 떨어진다면 상당수 중소기업은 문을 닫든가, 중국.동남아로 이전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게 된다는 얘기다.

환율뿐만 아니라 중국 변수가 나타난 것도 중소기업에는 위기다. 무역연구소 신승관 연구위원은 "80년대 후반 환율이 세 자릿수일 때는 중국이 막 개혁.개방을 시작할 무렵이라 중국과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지 않았다"며 "지금은 중국과 경쟁해야 하는데 환율까지 세 자릿수로 간다면 중소기업은 국내에서 경영하기가 사실상 어렵다"고 설명했다.

정영식 수석연구위원은 "채산성을 맞추기 위한 기업의 해외 이전 러시로 80년대 일본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은 국내산업의 공동화가 급속히 진행될 수 있다"며 "이럴 경우 실업률이 높아져 내수 침체까지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여행수지 적자 급증 예상=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을 기준으로 할 때 환율이 세 자릿수로 떨어지면 국민소득은 2만달러에 근접한다. 원화 가치가 높아지면 그만큼 달러표시 국민소득이 많아진다. 국내에선 잘 느끼지 못하지만 해외로 가면 구매력이 높아진 것을 실감하게 된다. 환율 하락은 수입물가 하락으로 나타나 국내 물가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80년대와 달리 지금은 여행이 자유화돼 세 자릿수 환율시대가 다시 올 경우 여행수지 적자가 급증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여행수지 적자는 올 들어서만 사상 최대치에 이르고 있다. 개인의 해외 부동산이나 금융자산 투자도 급증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해외투자나 부동산 구입 등에 대한 실효성 있는 관리방안 마련이 시급해졌다. 기업이나 개인이 환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파생상품 시장을 키우고 관련 규제를 완화하는 등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

정경민.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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