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국제무대 웃고 국내선 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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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앙겔라 메르켈(사진) 독일 총리의 경우가 딱 그렇다. 9일(현지시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하루였다.

독일은 이날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 재무장관 회의에서 유럽 안정 기금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000억 유로 규모의 안정 기금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먼저 한 것도 독일이었다. 메르켈 총리는 하루 전 “유로화의 안정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EU 내부의 의견을 조율해 단일한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데 앞장섰다는 평가다.

9일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에게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해 EU 국가들이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대유럽 파트너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의 이 같은 과감한 국제적 행보는 오히려 국내의 정치적 입지를 좁혔다. 같은 날 치른 선거에서 독일 여당인 기민당-자민당 연합정부는 6석의 상원 의석수가 걸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선거에서 패했다. 이로써 연합 정부는 상원에서 과반 의석을 잃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10일 “메르켈 정권이 상원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면서 감세·의료보험 개혁 등의 정책이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메르켈 총리에게 이번 선거 결과는 뼈아프다. 민심이 떠났다는 신호기 때문이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는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에 해당하는 최대 선거구다. 더구나 이번 선거는 지난 9월 총선 이후 첫 선거로서, 메르켈 총리에 대한 중간 평가적 성격이 짙다. 자민당 당수인 기도 베스터벨레 외무장관은 “연정이 국민의 신뢰를 위반했다는 명백한 ‘경고 사격’”이라고 분석했다.

메르켈 총리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독일 의회의 그리스 지원안 통과(7일)였다. 그리스에 대해 비판적 여론은 더 강해졌다. 선거 하루 전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지지 정당을 바꾸겠다는 응답자가 21%나 됐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에 대해 “국민이 반대해 온 그리스 구제안을 정부·의회가 통과시킨 데 대한 공분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상반된 평가의 배경에는 메르켈 총리 개인의 정치 역정이 맞물려 있다. 그는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통독 후 최초의 동독 출신 총리, 전후 독일 최연소 총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며 2005년 총리가 됐다. 취임 후 그는 위기 때마다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해 ‘독일판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부가세 인상, 공공 부문 임금 동결 등의 과감한 개혁 정책으로 2003년 국내총생산(GDP)의 4%에 달하던 재정적자를 털고, 집권 2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이 때문에 메르켈 총리는 EU 내에서 ‘독일식 긴축’을 강조할 수 있었다. EU 내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독일부터 솔선수범했으니 다른 유럽 국가들도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거였다. 독일의 긴축 노력 덕분에 그는 유럽 내 경제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독일 국민들은 그리스 지원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게 됐다. 독일 국민이 힘들여 쌓아둔 곳간을 다른 나라를 위해 헐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는 지금 유럽 경제 안정과 국내 정치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상황은 열악하다. 유럽의 경제안정은 멀고, 독일 국민을 설득할 명분은 약하다. 세계의 이목이 메르켈의 정치적 리더십에 집중되는 이유다.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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