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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황지우 '11월의 나무' 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1월의 나무는,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증 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測光)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황지우(1952~ ) '11월의 나무'중

연속방송극을 볼 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이 조명이다. 기껏해야 촛불이고 호롱불일 조선시대 안방이 전기회사의 협찬인지,대형 냉면집만큼 눈부시게 밝다. 진짜 삶을 비추는 조명기술이라면 황지우 시인 정도는 돼야지. 이런 시의 "측광"을 "선거 끝난 담벼락"같은 이승 쪽으로 때려 보라.11월이 와 있음을 알리라. 그런 조명 아래 나무 한 그루쯤 세워 놓으면 설핏한 생의 옆모습이 보인다. 그런 나무 아래로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라.

김화영 <시인>

▶김화영 시인 약력:1941년 경북 영주 출생,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현대 프랑스 비평의 이해' 등 평론집과 산문집.번역서 다수, 한국펜문학상.팔봉비평문학상 등 수상. 현 고려대 불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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