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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쉽게 소송 풀어가는 하버드에 한 수 배웠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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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호 14면

비스무트에 참가했던 6명의 사법연수원생. 왼쪽부터 이승엽·송지연·조아라·원유민(앉은 사람)·조건희·윤국정 시보. 신인섭 기자

사법연수원생 송지연(25·여)·조아라(26·여)·이승엽(27)·조건희(29)씨는 각각 창원지검·제주지검·순천지청·안산지청에서 검사 시보로 일하고 있다. 원유민(27·여)·윤국정(27)씨는 변호사 시보다. 두 사람은 외국 법률기관 연수를 택했다. 원씨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위치한 르완다 전범재판소(ICTR)에서, 윤씨는 홍콩에 있는 영국 로펌 ‘링크 레이터스(Link Laters)’에서 실무를 배우는 중이다. 이들 6명은 지난해 3월 일산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40기 연수생이다. 지난 1월부터 판검사, 변호사 사무실을 각각 2개월씩 돌면서 현장 실무를 익히고 있다. 이들은 한 달여 전인 지난 3월 말 평생 잊기 어려운 특별한 경험을 같이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상사중재 모의재판’에 사법연수원 대표로 처음 출전했던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저명한 국제중재인 이름을 따 ‘비스 무트(Vis Moot)’라고도 불리는 이 대회는 제섭(Jessup) 국제법 모의재판 대회와 더불어 국제 모의재판 대회의 양대 산맥으로 통한다. 모든 경연을 영어로 하기 때문에 미국·캐나다·인도 등 영어권 국가 로스쿨팀이 유리하다. 특히 올해는 참가 팀도 많았다. 전 세계 62개국에서 253개 로스쿨(법학도 1500여 명)이 몰려들어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럼에도 첫 출전한 한국의 사법연수원팀은 본선 32강까지 오르는 뜻밖의 성과를 거뒀다. 최근 6명을 함께 만나 대회 도전기를 들어봤다.

62개국 253개 로스쿨과 실력 겨룬 사법연수원생 6명

“지난해 10월 연수원 자체 선발을 거쳐 6명이 출전 선수로 확정된 뒤 6개월 동안 주말을 반납한 채 대회를 준비했다. 도중에 연수원 기말시험이 겹쳐 힘들었지만 영어 변론 대본을 만든 뒤 입에서 술술 나올 때까지 외우고 또 외웠다. 중재인이 질문할 듯한 예상문제를 100여 개 만들어 실전처럼 질문하고 답변하는 훈련을 수십 번씩 했다. 예선을 거쳐 본선 32강까지 오르자 그동안 고생했던 기억들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지더라.”

팀장 조건희 시보는 힘은 들었지만 첫 출전인데 좋은 성적을 올린 것에 만족해했다.
이들은 항공료와 숙박비 등 대회 참가비용도 전원 자비로 충당했다.

이들이 출전을 결심한 직접적 동기는 연수원에 강의를 나온 국제중재 전문가 김갑유(법무법인 태평양 국제중재팀장) 변호사의 권유였다. 원 시보는 “미국 하버드대, 영국의 킹스 칼리지 로스쿨 등 세계적인 로스쿨 학생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체험하고 싶기도 했다”고 출전 이유를 설명했다.

비스 무트는 예선은 리그전으로, 본선은 토너먼트로 진행된다. 연수원팀은 본선에 오르기 전까지 10경기를 치렀다. 먼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연습대회인 ‘프리 무트(Pre Moot)’(3월 20~22일)에선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대, 미국의 튜오로 로센터(뉴욕) 등 강자들과 6경기를 치렀다. 6명이 3개 조가 되어 번갈아 상대 팀과 맞붙었다. 결과는 6전 전패였다. 경기마다 3명의 중재인이 점수를 매기는데 전체 18명의 중재인 중 14명은 연수원팀이 졌다고 평가했다. 2명은 연수원팀의 승리를, 2명은 무승부를 선언했다.

이 시보는 “프리 무트는 참가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데 우리는 사전 경험을 쌓기 위해 출전했다”며 “그때의 쓰라린 경험이 오히려 본선 진출에 약이 됐다”고 말했다.
“점수 차이가 1~2점이긴 했지만 큰 충격을 받았죠. 이후 빈으로 이동해 한국에서 준비해온 변론 대본의 구조와 문장을 확 뜯어고쳤어요. 외국 팀들이 환영 파티에 가서 술과 음식을 즐길 때 우리는 호텔 방에 머물며 새로 만든 대본을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송지연 시보)

예선 리그전(27~30일) 땐 하루 한 팀씩 4경기를 치렀다. 첫 상대는 미국 플로리다주의 노바 사우스이스턴대 로스쿨팀이었다. 이후 폴란드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대, 독일 뮌헨대, 인도 구자라트대 로스쿨팀과 차례로 맞붙었다. 송 시보는 “베오그라드 참패 이후 전략을 수정한 것이 힘이 됐던 것 같다”며 “뮌헨 팀은 독일인 특유의 관념론을 펼쳐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인도 팀은 진짜 변호사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변론을 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연수원생들에게 가장 긴장된 순간은 예선 마지막 날(30일) 본선 진출 64개 팀 발표 때였다. 처음에 호명된 32개 팀에 사법연수원은 없었다. 애가 탔다. 하지만 이어진 발표에서 사법연수원의 영문명인 ‘Judicial Research & Training Institute’가 호명되자 연수생들은 괴성을 지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그럴 만했죠. 본선 64강에 진출한 아시아 팀은 사법연수원팀 말고는 인도·홍콩·인도네시아 로스쿨팀이 전부였거든요. 우리 말고는 다 영어권 국가였고요. 우리는 미국의 코넬대·하버드대·컬럼비아대 로스쿨, 독일 뮌헨대 로스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본선에 올랐어요.”(조아라 시보)

기쁨도 잠시, 이튿날인 3월 31일 오전 8시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빈인터내셔널센터(VIC)에서 본선 첫 경기(64강전)가 열렸다. 침착함이 돋보인 원유민·이승엽 시보 조가 변론을 맡고 나머지 팀원이 측면 지원에 나섰다. 긴장한 표정의 원·이 시보는 피고석에 앉아 원고석의 미국 툴레인대 로스쿨팀을 바라봤다. 뉴올리언스주에 위치한 해상 전문 로스쿨이라 녹록지 않은 팀이었다. 양 팀은 수출계약 이행 과정에서 리스크가 발생할 경우 수출국과 수입국 중 어느 쪽이 손해를 부담해야 하는가를 놓고 법리 공방을 펼쳤다. 연수원팀은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는 다 놓칠 수 있다’는 한국 속담 등을 적절히 인용하며 피고 측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의외로 경직돼 있다는 느낌을 준 미국 팀을 꺾었다. 1시간 뒤 캐나다 퀸스대 로스쿨팀과의 32강전이 이어졌다. 이번엔 피고가 아닌 원고 측을 변론해야 했다. 연수원팀은 정연한 논리로 핵심을 찌른 캐나다 팀에 패했다. 거듭된 경기로 인한 긴장과 수면 부족 탓에 원고와 피고를 혼동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 패인이었다. 이 시보는 “캐나다 팀 코치들이 경기가 끝나고 ‘수고했다’며 악수를 청하기에 ‘다음엔 서울에서 한국어로 승부했으면 좋겠다’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진 게 기억난다”며 웃었다.

대회 우승은 캐나다 오타와대 로스쿨팀을 꺾은 영국의 킹스 칼리지가 차지했다. 하버드대 로스쿨팀은 16강에서 탈락했지만 뛰어난 변론 능력을 보여줬다.

“하버드팀 경기에 중재인으로 참여한 짐 모리슨 호주 변호사의 분석에 따르자면 하버드팀은 대결을 할 때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인터내셔널한 접근법을 활용한다고 합니다. 반면 우승을 한 킹스 칼리지팀은 법률 조문에 충실한 영국식 접근법을 사용했답니다. 두 팀이 직접 대결을 하진 않았지만 중재인의 성향에 따라 우열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윤국정 시보)

조 팀장은 “국제중재 법정에선 중재인의 관심과 법정 분위기를 누가 장악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텍스트북이 아닌 실전을 통해 배운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폐막식 때 원유민·이승엽 시보는 상위 10%에 해당하는 점수를 취득한 참가자에게 주는 ‘우수 변론가상(Best Oralist)’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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