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작곡가들] 유영진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199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을 이야기하면서 그룹 H.O.T.를 빼놓을 수 없다. 이젠 해체됐지만, 이 그룹이 누렸던 대중적 인기를 능가할 그룹은 앞으로도 쉽게 나타나기 힘들 것이라는 데 많은 가요 관계자들이 동의한다. 한류(韓流.동아시아에서 한국 대중문화가 인기를 끄는 현상)의 진원지도 따지고 보면 그룹 H.O.T.다.

H.O.T.의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는 H.O.T.이후 S.E.S.와 신화.플라이투더스카이.보아를 연달아 인기 가수로 만들며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체의 대표 주자로 각인됐다.

작곡가 유영진(사진)씨. 서른살의 이 젊은 작곡가가 바로 H.O.T.를 비롯한 일련의 'SM 가수'들의 노래를 도맡아 만든 주인공이다. 그 자신 이미 두장의 음반을 발표한 싱어송라이터인 유씨의 서른해 삶은 그가 만드는 노래들 만큼이나 역동적이고 극적이다.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에 자신이 있었죠.전주상고를 졸업한 88년 가수가 되기 위해 상경했습니다.1년 동안 안해본 일이 없어요.세차장.배달원.막노동…. 이듬해 MBC무용단 공채에 합격했습니다."

90년에 입대한 그에게 군생활은 새로운 기회였다.

"1군사령부 예술단에 배속됐습니다. 그곳에서 건반 등 악기 연주와 작곡을 독학으로 공부했어요."

군에서 제대한 93년 현 SM엔터테인먼트의 전신인 SM기획과 계약했다. 매일 찾아와 군에서 만든 자작곡 1백50곡을 담은 데모 테이프를 꺼내놓는 그의 실력과 근성을 이수만씨가 높이 산 것이다.

94년 '그대의 향기', 이듬해 '두번째 이별'등 그가 발표한 두 장의 앨범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96년 3년 동안 준비한 그룹 H.O.T.를 세상에 선보이면서 그는 프로듀서로 화려하게 비상했다. 앨범 제작을 총괄한 유씨는 '전사의 후예' 등 자신이 부르기 위해 만들어둔 비장의 노래들을 선보였고, 전혀 새로운 댄스 그룹의 출현에 10대는 열광했다.

이후 H.O.T. 2~4집, S.E.S. 1.3.4집, 신화 1~4집, 플라이투더스카이 1~2집, 보아 1집이 모두 그의 손에 의해 탄생됐다. 그가 만든 이 앨범의 판매량을 모두 합치면 1천만장이 넘는다.

"가수든 작곡가든, 대중음악은 굶주린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가 불러서 음악에 여유가 묻어나면 안됩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내년 초 직접 프로듀서를 맡은 댄스 그룹을 선보이며 제작자로도 나설 그는 이번 주에는 자신의 세번째 독집앨범도 내놓는다. 리듬앤드블루스(R&B)를 기반으로 다양한 음악을 담은 그의 새 앨범은 극히 세련됐다. 그는 "대중음악 작곡가로서 시대적 요구에 맞는 음악이 뭔가를 우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