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민족 얼 지킨 간송, 그와의 약속 지킨 이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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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간송 전형필
이충렬 지음
김영사, 408쪽
1만8000원

1996년 5월, 한 남자가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뜰 흉상 앞에 서있었다. ‘개관 25주년 기념 진경시대전(眞景時代展)’이 열리고 있던 미술관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미술관을 세운 간송(澗松) 전형필(1906~62)을 마주한 듯 그는 마음으로 물었다.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왜 내 가슴이 이렇게 벅차오르는지요?’ 미국 애리조나에서 오로지 이 전시를 보려 먼 길을 온 그는 숨이 멎을 듯 밀려드는 감동 속에서 간송을 알고 싶은 갈증에 애태웠다. 그러곤 결심했다. ‘제가 선생님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왜 문화재 수집에 억만금을 쏟아 부었는지, 어떤 번민과 고통이 있었는지, 선생님이 수집한 문화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오늘의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방대한 자료와 고증을 거쳐 간송 전형필의 일대기를 쓴 이충렬씨는 “간송이라는 ‘큰 인물’을 탐구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고 행복한 여행”이었다며 이 책을 간송 선생의 영전에 바친다고 말했다. [김영사 제공]

그로부터 15년, 이충렬(56)씨는 『간송 전형필』을 써들고 귀국했다. 멕시코가 눈앞에 보이는 국경도시에서 잡화를 팔며 밤을 도와 자료를 읽고 공부하며 상상력을 펼친 결실이다.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처럼 펼쳐진다. 국내외 여러 매체에 단편소설·르포·칼럼을 써온 이씨의 필력은 100년 세월을 건너뛰며 간송 일대기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간송의 유족이 원고를 감수한 뒤 허구가 있음을 밝히는 조건으로 출판에 동의했으니 국내에서 처음 출판되는 간송의 전기로서 인정을 받은 셈이다. 간송미술관을 제 집처럼 지켜온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도 “(간송이) 너무 높은 산이라 아무도 오를 생각을 못했는데 고증에 충실한 우직함이 용하다”고 덕담을 했다.

“낮에 장사가 잘 안된 날에는 글을 안 썼다”는 이충렬씨의 한마디는 이 책에 들인 공을 짐작케 한다. 미술품 컬렉션 체험을 쓴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의 저자이기도 한 이씨는 “내가 뭘 좀 모아봐서 수장가의 마음을 안다”고 했다. 주머니가 두둑해야 도자기 한 점에 기와집 스무 채 값을 턱 던져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간송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1년에 쌀을 만 석 이상 수확하는 만석꾼이었으니 요즘 시세로 치면 연 소득이 450억원, 가산은 6000억원이 넘었던 백만장자였다. 이런 재물 바탕에 조선의 자존심인 글씨와 그림, 도자기와 서적을 지키겠다는 문화재 사랑의 정신이 있었으니 하늘이 내린 컬렉터라 할 수 있다. 나라는 지키지 못했지만 민족의 혼이자 얼인 문화재를 보존해 후손에게 남겨주겠다는 간송의 결심은 쉰일곱 짧다면 짧은 일평생 그가 견지했던 신앙 같은 것이었다. 그 덕에 우리는 지금도 봄과 가을에 간송미술관에서 펼쳐지는 국보(國寶)의 향연을 누릴 수 있게 됐다.

간송이 1935년 봄 당시 기와집 스무채 값인 2만원을 주고 소장한 고려시대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일본 총독부가 1만원에 사려다 주저앉았던 이 명품을 간송은 본 지10분 만에 한 푼도 깎지 않고 사들여 일본 골동상을 놀라게 했다. 게다가 일본 대수장가 무라카미가 두 배 값을 처주겠다고 양보하라 부탁했으나 거절했다. 이런 사연으로 이 땅에 남은 이 매병은 국보 제68호로 지정됐다.

간송미술관 올 봄 정기전시회는 16~30일 ‘조선망국 백주년 추념 회화전’을 주제로 열린다. 『간송 전형필』 출간으로 이번 정기전은 더 빛나는 잔치가 될 듯싶다.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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