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렬 지음
김영사, 408쪽
1만8000원
1996년 5월, 한 남자가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뜰 흉상 앞에 서있었다. ‘개관 25주년 기념 진경시대전(眞景時代展)’이 열리고 있던 미술관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미술관을 세운 간송(澗松) 전형필(1906~62)을 마주한 듯 그는 마음으로 물었다.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왜 내 가슴이 이렇게 벅차오르는지요?’ 미국 애리조나에서 오로지 이 전시를 보려 먼 길을 온 그는 숨이 멎을 듯 밀려드는 감동 속에서 간송을 알고 싶은 갈증에 애태웠다. 그러곤 결심했다. ‘제가 선생님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왜 문화재 수집에 억만금을 쏟아 부었는지, 어떤 번민과 고통이 있었는지, 선생님이 수집한 문화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오늘의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방대한 자료와 고증을 거쳐 간송 전형필의 일대기를 쓴 이충렬씨는 “간송이라는 ‘큰 인물’을 탐구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고 행복한 여행”이었다며 이 책을 간송 선생의 영전에 바친다고 말했다. [김영사 제공]
“낮에 장사가 잘 안된 날에는 글을 안 썼다”는 이충렬씨의 한마디는 이 책에 들인 공을 짐작케 한다. 미술품 컬렉션 체험을 쓴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의 저자이기도 한 이씨는 “내가 뭘 좀 모아봐서 수장가의 마음을 안다”고 했다. 주머니가 두둑해야 도자기 한 점에 기와집 스무 채 값을 턱 던져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간송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1년에 쌀을 만 석 이상 수확하는 만석꾼이었으니 요즘 시세로 치면 연 소득이 450억원, 가산은 6000억원이 넘었던 백만장자였다. 이런 재물 바탕에 조선의 자존심인 글씨와 그림, 도자기와 서적을 지키겠다는 문화재 사랑의 정신이 있었으니 하늘이 내린 컬렉터라 할 수 있다. 나라는 지키지 못했지만 민족의 혼이자 얼인 문화재를 보존해 후손에게 남겨주겠다는 간송의 결심은 쉰일곱 짧다면 짧은 일평생 그가 견지했던 신앙 같은 것이었다. 그 덕에 우리는 지금도 봄과 가을에 간송미술관에서 펼쳐지는 국보(國寶)의 향연을 누릴 수 있게 됐다.
간송이 1935년 봄 당시 기와집 스무채 값인 2만원을 주고 소장한 고려시대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일본 총독부가 1만원에 사려다 주저앉았던 이 명품을 간송은 본 지10분 만에 한 푼도 깎지 않고 사들여 일본 골동상을 놀라게 했다. 게다가 일본 대수장가 무라카미가 두 배 값을 처주겠다고 양보하라 부탁했으나 거절했다. 이런 사연으로 이 땅에 남은 이 매병은 국보 제68호로 지정됐다.
정재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