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순 · 정재승 교수의 과학 릴레이] 눈 깜빡임과 '도파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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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4면

어떤 일이 순식간에 벌어질 때 '눈 깜짝할 사이'라는 표현을 쓴다. 영어에도 같은 의미로 'in the blink of an eye'란 표현이 있는 걸 보면 '눈 깜짝할 사이'란 사람들이 쉽게 떠올릴 만한 가장 짧은 시간 단위가 아닐까 싶다. 눈 깜짝할 사이란 정확히 몇 초일까. 대략 0.1~0.2초다.

눈을 깜빡이는 패턴은 사람마다 대개 비슷할 것 같지만, 사실은 다양한 특성을 보인다. 갓난아기는 전혀 눈을 깜빡이지 않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깜빡이기 시작한다.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시간당 깜빡이는 횟수는 꾸준히 증가하다가 성인이 되면 일정해진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는 1분에 평균 15~20회 정도.

3~4초에 한 번 꼴이니 하루에 대략 1만 4천여번, 죽을 때까지 3억번 이상 깜빡인다는 계산이 나온다.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자주 깜빡일까. 이탈리아 연구진에 따르면 여자(l분에 평균 18회)가 남자(15.6회)보다 자주 깜빡인다고 한다.

하루 중에도 시간대에 따라 깜빡이는 정도가 다르다. 아침이나 낮에는 1분에 13회 정도 깜빡이지만, 오후 8시30분 쯤 되면 18회로 늘어난다.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도 깜빡이는 정도가 달라진다. 책을 읽을 때(분당 4~5회)는 거의 눈을 깜빡이지 않지만, 대화를 하거나 비디오를 볼 때(20~26회)는 그 횟수가 크게 증가한다.

특히 뭔가 외운 다음 암송할 때는 깜빡이는 정도가 30회 이상으로 늘어난다. 갓 외운 시를 암송할 때 눈을 심하게 깜빡거리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 이렇게 눈 깜빡이는 정도가 변하는 것일까. 사람의 눈 깜빡거림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과학자는 미국립보건원의 크레이그 카슨 박사다.

그에 따르면 눈 깜빡거림은 뇌 안의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의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파민은 몸의 움직임을 관장하거나 뇌의 여러 영역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카슨 박사는 약물 실험을 통해 도파민 분비가 늘어나면 눈을 자주 깜빡이게 되고, 도파민 활동이 줄어들면 덜 깜빡이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도파민 활동을 측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체내 도파민 양이 파킨슨병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질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도파민 분비가 심하게 줄면 '파킨슨병'에 걸리고, 지나치면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다. 파킨슨병은 손을 심하게 떨고 자신의 몸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는 질환으로, 권투선수 알리나 영화배우 마이클 J 폭스도 이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눈 깜빡거림은 뇌를 열어보지 않고 도파민 활동을 간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신과 의사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눈 깜빡거림'으로 도파민 수치 변화를 관찰해 환자에게 언제 약을 투여해야 할지, 또 경과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파악하는 방식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인식조차 못 할 때가 많은 '눈 깜빡거림'이 의사들에겐 질병 상태를 체크하는 중요한 특성이라는 사실이 자못 흥미롭다.

정재승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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