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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 추적하다 전직 대통령 비자금 통장 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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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검은 돈을 받고서 순순히 “내가 받았소”라고 자백하는 사람은 없다. 부인하는 그들의 입을 열게하는 검찰의 결정적인 무기가 자금추적이다. 이리저리 세탁한 불법 자금이 흘러들어간 정황을 잡아내 들이밀면 모르쇠로 일관하던 피의자들은 눈물을 떨어뜨린다.

이광호(58·사진) 대검찰청 자금추적팀장은 1980년대 검찰에 불모지였던 자금 추적 분야를 개척했다. 20여 년간 자금추적으로 숱한 대형 사건 해결의 열쇠를 만들었던 그가 지난주 검찰을 떠났다. 항상 빛나지 않은 곳에서 수사를 빛냈던 ‘계좌 추적의 달인’을 퇴직 하루 전인 지난달 29일 대검 사무실에서 만났다.

-자금추적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86년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근무할 때였다. 경찰관 한 명이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았는데 뇌물 공여자의 진술이 나왔고 해당 경찰관이 이서한 수표까지 확보됐다. 그쯤 되면 자백을 하게 마련인데 경찰관이 끝까지 억울하다고 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수표가 어떻게 유통됐는지 과정을 살펴봤더니 공여자가 경찰관으로부터 500만원짜리 수표에 이서를 받은 뒤에 수표를 재발행해서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이 확인됐다. 정밀 수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금추적을 거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좌추적을 어떻게 배웠나.

“당시에는 자금추적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래서 시중은행 6곳의 연수원 교육 책자를 얻어 독학했다. 직접 은행에 가서 직원들에게 전표 보는 방법 등을 배웠다.”

-계좌추적으로 개가를 올린 사건의 예를 든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의 경우, 공여자들이 돈을 준 사실을 부인하는 통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때 자금추적 과정에서 현철씨 차명 계좌에 세탁된 돈 2억원이 들어간 정황이 나왔다. 연결 계좌를 보니 거액의 돈이 오간 흔적을 추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 수사가 급물살을 탔다. 한 번은 동화은행(89년 설립됐으나 98년 퇴출돼 신한은행에 흡수됨) 본점 측이 현금을 찾아 인근 지점을 돌면서 수표를 발행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복잡한 경로를 따라 수표를 추적해보니 당시 청와대로 들어간 사실이 확인됐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관리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통장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차남 사건 역시 수사 포기를 생각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교묘한 수법의 돈세탁 사실을 포착하면서 수사가 풀리기 시작했다. 대북송금, 불법 대선자금 등 큰 수사에서 언제나 자금추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즘은 현금을 전달하는 일이 잦아 자금추적에 한계가 있지 않은가.

“현금을 이용해도 자금추적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거액의 돈을 인출해야하고 받은 사람 역시 거액의 돈을 입금하기 때문이다. 돈 받은 사람이 어디에 돈을 썼는지도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검찰에서 이 팀장의 퇴직에 따른 업무 공백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현장에서 직접 익힌 자금추적 기법을 수사관 수십 명에게 전수했고 『금융거래 추적 입문』 등 참고 서적도 여러 권 썼다. 후배들이 잘 할 것이다.”

-앞으로 계획은.

“서초동에서 법무사 사무실을 연다. 수십 년간 남의 불법자금만 쫓아다녔는데, 이제는 내 돈도 좀 벌어야 하지 않겠나.”

전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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