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세돌 '형세판단' 잘못 패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낙관이냐, 비관이냐. 전투냐, 타협이냐.

망망대해 같은 바둑판 위에서 숨가쁜 접전이 펼쳐지면 형세판단이야말로 수의 강온을 조절하며 안개속을 헤쳐나가는 유일한 나침반이 된다.

10~11일 부산대에서 벌어졌던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8강전.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이들 네판의 대국은 대부분 '기술'이 아니라 '형세판단'에서 승부가 갈렸다.

세계 최강 이창호9단 대 신예 최강 이세돌3단의 대결은 이세돌의 '공격'과 이창호의 '수비'가 팽팽히 맞서며 명승부를 연출했다. 이9단은 빠른 발걸음으로 실리를 챙겼고 이3단은 대공습을 예고하며 힘을 비축해 나갔다.

기보 흑1로 드디어 이세돌은 공습을 감행했고 패싸움 끝에 우변을 몽땅 수중에 넣었다(7.10.13은 패때림). 이때 TV해설자나 검토실의 프로들은 한결같이 흑의 우세를 말했다. 흑집은 우변만 줄잡아 70집. 좌변 흑은 A의 맥점 등이 있어 쉽게 수습된다. 그렇다면 백은 도저히 집부족이 아닌가.

하지만 대국 당시 이세돌3단은 형세를 크게 비관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는 이 무렵부터 갑자기 특유의 날카로움을 상실한 채 실수를 거듭하다가 불계패를 당했는데 알고보니 그 원인이 지나친 비관에 있었던 것이다(이9단은 미세한 국면으로 파악하고 긴장상태. 좌변의 공격권을 쥐고 있지만 실리가 부족하여 부담스러운 국면이었던 것).

이 역전 스토리는 지난 봄 LG배에서의 역전패와 비슷하다. 비관적 형세판단이야말로 이세돌의 정상 정복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셈이다.

신예 안달훈4단도 조훈현9단과의 대국에서 이미 역전 무드였는데도 그걸 감지하지 못하고 계속 강경하게 나가다가 반격에 휘말려 대패하고 말았다.

여성강자 루이나이웨이(芮乃偉)9단도 또 한번 가슴을 치며 자신의 과격함을 후회했다. 중국랭킹 1위 창하오(常昊)9단과의 대국에서 초반 대우세를 확보하고도 대마를 살지 않고 초강수를 고집하다가 역전패를 당한 것인데 어찌나 억울했던지 그녀는 29집반을 진 바둑을 끝까지 계가했다.

중국 마샤오춘(馬曉春)9단과 대결한 17세 박정상2단의 패인은 결단을 내릴 타이밍을 놓친 것이라서 앞의 3인과는 약간 다르다. 박2단은 예상외의 훌륭한 바둑으로 馬9단을 괴롭혔으나 후반부터 조여오는 馬9단의 세기에 굴복하고 말았다.

신예들의 힘이 거세게 분출하고 있지만 세계 바둑계의 판도는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이번 삼성화재배 8강전도 '높은 정상의 벽'을 확인한 채 막을 내렸다. 백지 한장의 차이라지만 큰 승부에서는 그게 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11월 6~9일의 4강전은 조훈현-마샤오춘, 이창호-창하오의 대결.

박치문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