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브라보 my LIFE] 천안 향토사학자 임명순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글=조한필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천안의 향토사학자 임명순씨가 지난해 10월 완공된 천안 병천면소재지의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조형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조영회 기자]

“천안함 사건이 남북통일의 계기를 마련할지도 몰라요.” 천안의 향토사학자 임명순(63·천안 다가동)씨가 만나자마다 불쑥 천안함 얘기를 꺼냈다. 천안함 침몰 사건 때문에 미국·중국 등 주변 강대국과 북한과의 역학관계 변화가 일어나면서 통일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놀라운 추론이다. 임씨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고려 태조 왕건이 ‘천안’을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투 교두보로 삼아 후삼국을 통일했듯이 ‘천안함’이 그 역할을 하는 게 아니냐.”

불현듯 정확히 1080년 전인 서기 930년 왕건과 함께 태조산에 올라 천안 지형을 살핀 술사(術師) 예방이 생각났다. 당시 예방은 왕건에게 “천안은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로 여기서 병사를 훈련시키면 견훤의 후백제가 항복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방은 당시 최고의 풍수지리가였다. 임씨에게 “천안함 사건 때문에 만약 통일이 되면 임 선생이 후삼국 통일을 예언한 예방이 되겠네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크게 웃음이 터졌다.

『천안시지』 오류가 향토사 관심 불러

임씨는 1990년대 중반부터 향토사를 연구했다. 그동안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갖고 새 사실들을 밝혀냈다. 특히 유관순 열사(1902~1920)와 관련해 지난 10년간 ‘특종감’을 여럿 쏟아냈다. 유 열사 태어난 해가 1904년이 아니라 1902년이라는 사실도 그가 밝혀냈다. 유열사의 제적(除籍)등본을 구해 확인한 사실이다. 임씨는 “유 열사 추앙사업이 펼쳐지면서 어린 나이를 강조하려다가 그런 오류를 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향토사 연구는 1997년 천안시 발행『천안시지(天安市誌)』의 천안군 연혁(p125) 중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면서 시작됐다. 임씨에 따르면 시지에 ‘고려 7대 목종때(1005년) 천안군이 폐군되었으며 그 사유는 알 수 없다’고 돼 있는데 사실은 ‘도단련사(都團鍊使)’가 사라진 것이지 천안군이 없어진 건 아니라는 것. 그는 “이때 향토사 연구에 내 할 일이 있겠구나 싶어 관심을 갖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 천안시지 오류를 2년 전 문을 연 천안박물관은 지금껏 따르고 있다.

70년대 농촌진흥청서 통일벼 연구

그는 당시 ‘시골’이던 천안서 태어나 항상 주위에서 쉽게 보던 농민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 공부는 대전(대전중·고교 졸업)에 유학 갈 정도로 아주 잘 했다. 대학은 서울대 농대로 진학했다. 소신 지원이었다. 농학을 전공한 그는 70년대 농촌진흥청에서 조생통일벼 개발을 연구했다. 그 연구는 유신시대 벼 생산량 증대를 위한 범국가적 프로젝트였다. 이후 고향 천안에 돌아와 농산물 유통업에 뛰어들어 농협공판장 설립 등에 관여했다. 그런 그가 50을 넘긴 나이에 향토사에 눈을 돌린 것이다.

“천안에 대한 문헌 자료는 너무 적다.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초기 역사서에서 200여 년 뒤 『영성지(천안)』 『대록지(목천)』 『직산현지』등 향토기록으로 뛰어 넘어버린다. 그 사이와 그 이후 자료가 없다.”

그래서 임씨는 그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온 글이 『조선왕조실록 속의 천안 이야기』(1999년) ‘독립신문 속의 천안관련기사’(향토연구 10집, 1999) ‘연려실기술의 천안 기록’(향토연구 11집, 2000) ‘고종시대사 중 천안편’(향토연구12집, 2001) ‘1927년도 천안의 생활상’(향토연구 14집, 2003) ‘대한제국관보의 천안관련 기사’(향토연구 16집, 2005) 등이다.

그의 자료 수집은 집요하고 조직적이다. 유관순 열사 관련 법원 판결문을 모두 찾아냈다. 그래서 1심 형량이 7년이 아니라 5년이었고, 2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는 걸 알아냈다. 지난해 유 열사가 3심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은 것도 확인했다.

일제 때 지적도를 구해내 아우내 만세시위 장소가 현재의 병천장터가 아니라 그곳에서 200~300m 떨어진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자리라는 것도 밝혀냈다. 최근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매일 발행된 매일신보를 모두 읽었다. 4개면씩 발행된 이 신문에서 천안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 읽었다. 웬만한 끈기가 없으면 힘든 일이다. 독립기념관에서 촬영 파일을 컴퓨터로 다운받아 확대하며 읽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1930년대 일제가 학교를 많이 세웠다. 그 바람에 초등교육 혜택이 많은 사람에게 돌아갔다. 교사 육성도 속성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실업률이 크게 떨어졌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일제의 중국 침공이 시작되면서 한국사람들을 보내 이용하려다보니 최소한 일본어와 기초행정 능력을 갖춘 인력이 필요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32년 기사에는 천안의 특산 명물로 ‘호두 양갱’을 거론하고 있다. 호두과자가 나오기 전 이야기다. 동아일보도 창간부터 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천안 기사를 찾아 읽었다.

죽을 때까지 천안 역사 찾아 나설터

이 탓인지 일제강점기 천안에 관해 임씨 만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와 앉아 있으면 처음 듣는 사실이 수도 없이 튀어 나온다. 천안 지역사 연구자들 중 많은 이가 임씨 도움을 받았다.

그 덕에 독립유공자 지정받은 분들도 있다. 천안만세시위 관련 3명, 목천만세시위 2명 등이 사후 유공자로 지정됐다. 후손들이 많이 고마워 했겠다고 묻자 그는 “해방이후 돌아가신 분의 후손들에겐 금전적 혜택이 없어서 그런지…” 하며 말끝을 흐렸다.

요즘 임씨는 ‘박관실’이란 인물에 주목하고 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조선 군대가 해산되자 그는 부하 김경문(95년 건국훈장) 등과 함께 목천 일원에서 크게 활약했다. 청주 출신 의병장 한봉수(1883~1972)도 가까운 지역에서 그와 함께 활동했다.”

천안은 동학농민전쟁 때도 중심에 있었다. 동학군이 공주에 집결해 있을 때 그 전면에 있는 천안 성남면 세성산성에서 일본군을 대적했다. 당시 목천·직산엔 동학교도가 많았다.

그는 아직 할 일이 많다. 요즘 폐콘크리트 이용 기술로 따낸 특허의 사업화에 분주하지만 그의 인생 종착점은 역시 향토사 연구다. 궁금한 것도 많고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할 것도 많다. “죽을 때까지 찾고 또 찾아 나설 생각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