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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칼럼] 역사를 위한 반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재고한다는 뜻의 리싱킹(rethinking)이란 단어에는 분명 저항의 냄새가 난다.

거기 자본주의가 붙어 '리싱킹 캐피털리즘'이 되면, 이봐 요즘 아주 잘 나가는 것 같은데 초장 끗발이 파장 따라지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구…대강 이런 의미로 들린다.

또는 마르크스주의가 뒤따라 '리싱킹 마르크시즘'이 되면, 글쎄 어쩌다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돼버렸지만 좋은 시절이 다시 올지 모르니 너무 낙담 말라구…이런 뜻으로 읽힐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반역의 함축이 근사해서 책을 모으다 보니, 그런 제목으로 시작되는 책이 제법 여러 권이다.

*** 과거에서 추린 작은 조각

그러면 '리싱킹 히스토리'는 어떠한가? 역시 제목만 보고 책을 샀는데 그 번역본이 케이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혜안, 1999)이다. 이 책은 나의 허황한 기대대로(!) 무슨 반역의 의도를 감춘 비본(?) 역사책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학) 입문을 위해 주요 논쟁점을 소개한 논쟁적 입문서이다. 논쟁이란 말이 붙으면 그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저자가 슬며시 겨냥한 과녁에는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들어 있다.

그러니까 역사 이론서임이 분명한데, 그렇다고 "역사 이론씩이나" 하며 미리 내뺄 필요는 없다. 우선 짧고(!), 별로 어렵지 않고, 그리고 읽은 뒤에 제법 남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론보다 담론(談論)을 더 좋아한다. 내가 내 멋에 겨워 지껄이는 이야기가 어깨에 힘주고 한 수 가르치려 드는 당신의-무림 고수의-말씀보다 못할 것이 없지 않으냐는 엇지르기인데, 말하자면 그것도 반항이다.

그는 먼저 "역사란 과거에 대한 하나의 담론이니"(31쪽) 과거와 역사를 구별하라고 충고한다.

과거에 살아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과거를 다시 만들 수도 없는 주제에 '이것이 역사'라고 마구 써 갈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침이다.

우리가 역사라고 믿는 것은 숱한 과거 가운데 사가들이 추려낸 작은 조각에 불과하며, 그래서 "역사는 역사가 또는 역사가인 양 자처하는 사람들의 수고의 산물"(33쪽)이다. 실로 '역사'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역사들'이 되어야 한다.

그 많은 과거를 그 '작은'역사 안에 어떻게 다 담아내느냐는 기술적인 애로도 물론 문제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과거에서 역사를 추려내는 과정에 개입하는 사가의 관심과 이해(利害)이다. 모두가-압도적 다수가-수긍하는 절대적 기준이 없으므로 그 개입은 항상 시비를 부르게 마련이다.

자신이 몰리는 경우조차 "대개의 역사가는 자신이 일종의 허구를 만들어내는 작가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41쪽)는 것이다.

자책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느낌도 들지만 "역사는 이론이고, 이론은 이데올로기적이며, 이데올로기는 바로 물질적 이해일 뿐"(62쪽)이라는 침통한 고백과 용기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가장 큰 위험은 사가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외압'과 공모하는 경우이다.

저자는 "역사를 '힘의 마당'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 담론이란 곧 이해 당파들이 자신을 위해 직접 역사를 조직해내는 방법"(18쪽)이라고 주장한다.

이 정도라면 그냥 들어줄 만도 한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를테면 "역사는 결단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항상 누구를 위해 존재한다"(57쪽)는 무엄한 언사에 이르면 자꾸 속이 켕긴다.

누군가를 위해 존재한다니 그 누군가가 누구야 하고 누가 큰소리로 물어보면 정말로 큰일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흑인,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따위의 주제는 미국 학교의 수업에서 거의 배제되어 있다.

그런 강좌를 개설하고 교재에 포함시키라고 주장하면, 지금까지의 결정권자들이 완강히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특정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이유지만, 그 요구를 거부하는 자신들의 판단 역시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혹여 피지배자의 반발이 강할 경우 충돌은 피할 수 없으며 "이런 갈등 속에서 역사는 날조되고"(58쪽) 만다.

그래서 "이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바꾸어야"(58쪽)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재를 통제하는 사람이 과거를 통제하고, 그 과거를 통제하는 사람이 미래를 통제한다"(59쪽)는 오웰의 예지를 실감하게 된다.

*** 나를 '저술한' 시대의 전설

그러면 저자 자신은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가? 문득 리오타르를 가리키며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심들의 죽음'이고 '메타 이야기들'에 대한 불신이라고 외친다.

"권위적인 역사와 포스트모던의 과거 부재라는 진퇴양난의 틈바구니에서"(1백60쪽)

"포스트모더니즘의 결과를 민주적 해방이라는 적극적 방향에서 '역사적으로' 모색하는 방법을 제시하려는"(1백62쪽) 것이다.

중립마저 어느 한쪽을 편드는 행위라고 의심하는 '반성적 방법론'과, 거기 적합한 역사적 재료들을 선택하는 노력이 이 '민주적 해방'에 속한다.

나로서는 "지금까지 '나'를 생산해낸 시대가, 혹은 한 권의 책을 저술하듯 '나를 저술한'시대가 마찬가지로 여러분을 저술해왔고 이후에도 계속 여러분을 저술해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26쪽)

이처럼 '역사 재고' 작업에 나섰다는 저자의 담담한 술회가 무엇보다도 가슴에 와 닿았다.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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