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나이폴의 작품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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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제3세계의 솔제니친'으로 불리는 V S 나이폴은 1990년대부터 줄곧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오르내렸다. 영국 옥스퍼드대 장학생 출신다운 적확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25권의 작품을 펴냈으며 출신지인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비롯한 제3세계 문제를 밀도 있게 다뤄 서구문단에서는 1급 작가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적 영역은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넘어 인도.아프리카.아메리카.아시아의 이슬람 세계를 아우르고 있다"고 스웨덴 한림원이 밝혔듯 나이폴의 문학은 그 주재나 소제에서 세계성을 띠고 있다. 거기에 서구 문단이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동양적 사고, 인도의 신비주의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오래 전부터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돼 왔던 것이다.

21세기 현 시점에서도 서구의 작가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역사.언어.인종, 그리고 식민과 탈식민 의식을 문학의 주제로 삼고 있다. 나이폴과 '악마의 시'의 작가 샐먼 루시디 같은 작가들도 다양한 관점에서 이런 주제를 붙들고 늘어져 주목받고 있다. 탈식민주의 연구는 20세기 후반들면서 서구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나이폴의 대표작인 『세계 속의 길(A Way in The World)』도 탈식민주의를 다루고 있는 장편소설.

영국의 식민 치하에 있던 40년대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무대로 한 이 작품은 식민지의 질곡을 종주국을 비난하면서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의 본성을 탐구하면서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 흑인 청년 블레어는 영국에 유학, 국제금융 전문가로 성장한다. 식민 치하의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총독부가 금괴와 상아 밀수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그는 결국 암살당하고 만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면서 남미의 역사와 이민족의 지배 아래 놓인 원주민의 고뇌를 깊이있게 그리며 개인과 국가와 세계를 새롭게 탐구한 대서사시란 평가를 받았다.

32년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인도계 가정에서 태어난 나이폴은 트리니다드 칼리지 졸업 후 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언론인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BBC에서 몇년간 근무한 뒤 작가로 데뷔했다. 57년 첫 장편소설 『신비의 마사지사』로 영국의 신인작가를 위한 문학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신비의 마사지사』는 기지를 발휘해 국회의원의 자리에 오르는 인도계 이민자를 그린 작품. 이어 식민지 독립에 성공한 신흥국가의 혼란을 해학적으로 그린 『엘비라의 참정권』(58년)을 출간했다. 또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하층 사회를 소재로 한 『미겔 스트리트』(60년)와 인도계 이민 3대의 역사를 그린 『비스와스씨를 위한 집』(61년)으로 1급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62~63년엔 조상의 고향인 인도를 여행했으며, 이후 제3세계에 대한 통렬한 비판자가 됐다. 71년엔 『자유의 나라』로 부커상을 수상했으며 90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에게서 기사작위까지 받았다. 96년 부인과 사별하고 같은 해에 파키스탄 출신의 부인 나디라 칸눈 알비와 재혼했다. 수상 소식을 접한 나이폴은 "예상치 못한 영광이다. 이 영광을 조국 영국과 인도, 그리고 나의 조상들에게 바친다"고 밝혔다.

그의 최근작 『신념을 넘어(Beyond Belief)』에서는 인도네시아와 이란.파키스탄.말레이시아 고유의 이슬람 정서를 분석하며 묘사하는 탁월한 기량을 보여 '전통'과 '현대'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슬람의 고뇌를 성실히 그렸다. 그러나 원리주의로 불리는 이슬람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해서 이번 수상을 놓고도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정치적 고려가 작용한 것 아니냐는 비난도 일고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서울대 영문과 교수인 장경렬씨는 "영어 문장이 아주 뛰어나 나이폴의 작품을 학생들과 독해 교재로도 사용했다"며 "식민지 출신의 현실의식과 인도계 태생으로서의 신비주의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이번 수상의 영예를 안게된 것 같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는 그의 장편소설 『미겔 스트리트』『세계 속의 길』『자유국가에서』『흉내』『거인의 도시』 등이 번역 출간됐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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