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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의 신중국 경제 대장정] 9. 사회주의 건설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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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노벨 경제학상 32년의 역사에서 경제발전론으로 수상한 사람은 1979년 영국의 아서 루이스가 유일하다. 그의 이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가족 4명이 달라붙어 쌀 20가마를 거두는 농가가 있는데, 식구가 하나 더 늘어 힘을 보태도 소출은 20가마로 변동이 없을 때가 있다.

유식한 말로 한계생산력이 0인 경우다. 그러면 그는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임금은 낮겠지만 한계생산력이 0은 넘을 것이다. 루이스는 이렇게 잉여 노동력의 농촌 탈출(rural exodus)을 제3세계의 발전 유인으로 잡았다.

60년대 우리의 산업화 경험이 그랬고, 그 상흔이 지금 달동네로 남아 있다.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도 이 길을 따르고 있다. 중국의 호구는 둘로 나뉘는데, 농촌 호구는 정부가 땅만 빌려주면 되지만 도시 호구에는 일자리를 나눠줘야 한다.

그래서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는 외부 천이(遷移)는 호구 변동이 없는 내부 전이(轉移)보다 한층 까다롭다. 한 조선족 청년은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베이징(北京) 회사에 근무하면서도 '지린(吉林)성의 농촌 호구를 베이징 도시 호구로 바꾸기가 쉽지 않아' 걱정이 많았다.

*** 도시로… 도시로… 이농 물결

정부로서는 농촌 탈출을 통한 산업화가 절실하지만 도시에 취직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엄청난 부담이기 때문이다.

개혁.개방 이전 농촌 인구는 82%였으나 국내총생산에의 기여는 28%에 불과했다. 현재는 68%로 줄었지만 여전히 8억6천만명에 이른다.

일부는 향진기업(鄕鎭企業) 근로자로 흡수되고, 다수는 도시 노무자인 민공(民工)으로 전락하고 있다.

향진기업이란 흙을 떠나도 고향을 버리지 않고, 공장에 다녀도 도시로 가지 않는다(離土不離鄕 進廠不進城)는 취지로 창설된 중소 도시 주변의 농촌 기업이다. 국가가 고용 의무를 던다는 점에서 정부는 향진기업의 장래에 대단한 기대를 걸고 있다.

문제는 대도시 주변의 '농촌 프롤레타리아' 민공이다. 농촌 호구를 바꾸지 않고 도시로 나온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불법 노동자다. 그 현장을 취재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쑤저우공업원구(蘇州工業園區)에서 실현됐다.

삽과 괭이로 토관 공사를 하는 인부들은 주로 톈진(天津)에서 왔다는데, 일당이 얼마냐는 우리 질문에 감독은 70~80위안쯤 된다고 얼버무렸고, 한 인부는 '눈치 없이' 30위안이라고 대답했다. 뒤에 다른 인부에게 다시 물어본 결과 "노임 27위안에 수당 3위안을 합쳐 30위안"이라고 이실직고했다.

물가는 다르지만 30위안이면 우리 돈으로 4천8백원이다. 이농 인구가 매년 6천만명에 이르고, 베이징만 해도 2백만 민공에 잡역을 맡기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살았다면 가장 먼저 해방할 대상이 바로 이들일 터이다. 가난한 농민에서 가난한 노동자로 변신한 이들은 분명 개혁.개방 진행에 커다란 암초다.

경제가 계속 성장할 때는 문제가 가라앉아 있을 터이나, 성장에 제동이 걸리면 밥과 집과 일을 달라는 이들의 함성이 체제에 엄청난 위협으로 떠오를 것이다.

구를 때는 관성의 힘으로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2008년 올림픽까지는 부자가 된다는 상징 조작으로 그럭저럭 굴러가겠지만, 그 뒤가 걱정이라는 소문이 많았다.

다른 또 하나의 함정은 부패다. 샤먼(廈門) 위안화그룹(遠華集團)의 세칭 홍루(紅樓)사건은 건국 이래 최대의 부정으로 중국을 발칵 뒤집었다.

*** 농민서 가난한 노동자로

홍루는 겉으로 보자면 특별히 모난 데가 없는 홍색의 7층 건물이다. 그러나 속은 전혀 딴판이어서 회사의 유혹에 넘어간 고위 관리들이 2층에서 먹고 마시며, 3층에서 목욕하고 안마하고, 4층에서 춤추며 노래하고, 5층에서 쑤항(蘇杭)의 절세미녀와 사랑을 나누고, 7층에서 뇌물을 받는단다.

최고급의 술과 안주는 물론 극치의 호사 서비스로 손님의 기부터 꺾는데, 총통으로 불리는 사장의 사무실과 총통 부인의 침실이 있는 6층은 손님 중에도 총통이 직접 관리하는 최고위 인사(VIP)만 드나든단다. 요컨대 홍루는 향응과 뇌물이 원스톱 서비스로 이뤄지는 부패의 온상이었다.

홍루 스캔들은 64억달러 규모의 대형 밀수사건으로, 97년 한해의 디젤유 밀수 하나만 해도 37선박에 1백만t이었다.

그 묵인과 협조 대가로 관청과 요로에 뿌린 뇌물은 현금 2백만위안, 집 한채, 외제 차 한대…, 이런 식이었다. 한 신문은 '집을 선물해 악마의 소굴로 끌어들이고, 차를 선물해 범죄의 궤도에 들어서게 했다'고 탄식했다.

사장은 98년 캐나다로 피신했으나, 1심에서 14명의 사형 선고를 포함해 샤먼시의 부서기와 부시장 등 1백20여명이 처벌됐다.

중국과학원과 칭화(淸華)대학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부패로 인한 손실이 8천억~1조2천억위안으로 국내총생산의 13~18%에 이르렀다.

사정의 중심인 검사 4백92명과 판사 1천2천91명이 오히려 사정 대상으로 처벌될 만큼 참으로 부정이 고황에 들었다. 중국 정부는 홍루를 부패 척결의 교육 전시관으로 지정하고 8월 27일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은 개관 닷새째인데, 서너 줄로 족히 3백m가 넘는 입장객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시간을 기다렸다가 홍루를 보고 나온 20대 청년은 "부패한 영도들을 총살해야 한다"고 분노를 터뜨렸다.

나로서는 홍루 부패보다 그것을 반부패 교육장으로 이용하는 결단에 마음이 착잡했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한 뒤 같은 잘못을 더는 범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그 치부를 공개하는 용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행 중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 관리의 수입은 정상 소득인 '백색 수입', 부패와 연루된 '회색 수입', 범죄에 해당하는 '흑색 수입'이 있다. 수입원은 덩치가 큰 공기업이기 쉬우며, 특히 국영기업이 관청에 보내는 회색 선물은 부패 개념이 아니라 정부 내부의 '공조'기능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 예산에 한도가 없다"는 야유가 나온 것은 거기에 뇌물까지 보태야 하기 때문이란다.

*** *** '民工'개혁의 암초될수도

홍루 사건은 물론 명백한 흑색 범죄에 속한다. 반면 장자강(張家港)에서 만난 한 기업인은 명절에 보내는 술병마저 돌려보낼 만큼 조심하는 관리들의 처신을 높이 칭찬했다. 그것이 뇌물이 아니고 단순한 선물임을 알리기까지는 몇년의 교유가 필요했단다.

뇌물 풍속도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듯했다. 어떤 잘못이 적발돼 봉투를 찔러주면, 대개는 받으면서 언제까지 시정하라고 지시한다.

그 언제가 되면 '반드시' 확인하는데, 행여 지시대로 시정되지 않았으면 '참말로' 귀찮아진단다. 그러므로 중국에서의 뇌물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속죄의 대가이지 '미래의 잘못'까지 포함한 묵인과 방조의 담보가 절대로 아니다. 뇌물의 이런 '적극적' 효용에 대한 강의는 여기서 처음 들었다.

여러 날 중국 음식에 물린 우리는 샤먼에서 한국 식당을 찾았다.

화가 출신의 아리랑대주루(阿里郞大酒樓) 장희석(張喜錫)사장은 "중국의 오늘을 이끌어가는 것은 덩샤오핑과 주룽지 총리"라고 단언했다.

鄧의 개혁.개방은 필요한 조처였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을 막으려는 노력 역시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부패와의 전쟁에 나서며 朱는 "내 것을 포함해 1백개의 관을 준비하라"는 비장한 말을 남겼다.

99명의 부패 분자를 관에 담으려면 자신도 들어갈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리라. 어디서 이런 정치인 좀 수입할 수 없을까?

정운영 <논설위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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