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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계 산소' 30대 극작가들 전성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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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어느 분야든 성장.발전의 열쇠는 '맨파워'다. 예술분야로 한정해 보아도, 최근 한국 영화 발전의 원동력은 풍부한 인력의 힘이라는 게 지배적인 견해다. 물론 풍부한 자본이 이들을 끌어모으는 구심점이 되어준 덕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극의 형편은 늘 가난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듯이 반드시 돈이 '좋은 예술'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다행히 연극계는 최근 '돈' 이상의 재능있는 맨파워의 진입이 곳곳에서 목격돼 한국 연극의 앞날을 밝게 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분야는 바로 희곡이다. 지금 연극계는 '창작극 부족'(한해 공연작 중 80% 이상은 번역극이다)이라는 해묵은 숙제를 이들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충만하다.

30대 중반, 혹은 막 30대에 진입한 신예 극작가들의 명단에는 이런 사람들이 올라 있다. '맏형' 격의 김태웅(36)을 비롯해 고선웅(32).배삼식(31).이해제(30), 20대 아홉수에 걸려 있는 박수진(29)과 여성 극작가의 기대주인 김명화(35) 등이다. 이미 상당할 정도로 검증된 '중고참'인 박근형.조광화.김윤미(여) 등의 다른 30대를 포함한다면, 지금 한국의 창작극은 이들 '30대 맨(우먼)파워'가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최근 입에 오르내리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작품 대부분이 이들의 머리에서 나왔다. '연극은 대(對)사회발언'이라는 명분으로 독특한 역사해석을 천착한 연출 겸업의 김태웅은 현재 연우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불티나'를 비롯해 '풍선교향곡''이(爾)' 등 최근 2~3년 사이 문제작을 선보이고 있다. 무거운 주제조차 희극적으로 풀어내는 풍자와 코미디 미학에서 후한 점수를 받고 있다.

1997년 삼성문학상(희곡) 출신인 김명화는 비평을 겸하면서, 여성다운 섬세한 감각으로 필명을 날리고 있다. 수상작인 첫 작품 '새들은 횡단보도로 건너지 않는다'(98~99년)를 중진 연출가 오태석이 탐을 내 직접 연출했을 만큼 일찍 재능을 인정받았다.부부의 균열을 다룬 최근작 '첼로와 케찹'도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이런 평가를 업고 김씨는 내년 일본 신국립극장에서 공연할 한.일 극작가 공동 창작품(제목 미정)의 한국측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

진지하며 탐색적인 두 사람에 비해 고선웅의 감각은 가볍고 발랄하다. 최근 동숭아트센터의 옥랑재단이 주는 '옥랑희곡상'을 수상한 고씨의 그런 감각은 현재 동숭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출작 '락희 맨 쇼'에서 두드러진다. '웃음 유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질이 떨어지지 않는 코미디 감각은 재치있다.

고졸 학력이지만 박학(博學)을 자랑하는 이해제는 전통 설화 등에 대한 이해가 대단하다. 뛰어난 사건.대사 구성력은 이런 기초에서 나온다.

99년에 선보인 '흉가에 볕들어라'는 이듬해 문예진흥원의 '내일을 여는 젊은 작가'로 뽑히는 데 크게 기여한 출세작이다. 얼마 전에는 '세기초기 괴기전기'라는 납량(納凉)물을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무서운 20대' 박수진은 나이 답지 않게 전통미학에 기반한 문학성있는 작품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김명화에 이어 98년 삼성문학상(희곡)을 탄 박수진의 대표작은 수상작인 '춘궁기'다. 올 여름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우리의 상황으로 완전히 개작해 예술의전당 야외극장에서 선보였는데, 매회 매진될 정도로 관객 반응이 뜨거웠다.

앞에서 소개한 작가들에 비해 배삼식은 아직 '미완의 대기'라는 표현이 맞다. 지금까지 주로 창작보다는 '제2의 창작'이라는 번안(飜案)에 힘을 쏟아왔는데, 그런 작업이 좋은 창작극의 씨앗이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8월 미추산방에서 공연한 번안극 '하얀 동그라미 이야기'는 특히 인정을 받아 이미 내년 예술의전당 공연작으로 낙점을 받은 상태다.

지금까지 극작계는 세대별 단절을 심하게 겪어왔다. 원로급 외에 40~50대에서 그게 극심했는데, 그래서 개성있는 극작술로 생기를 주는 이들 30대 극작가들의 질주에 적극적인 애정의 채찍이 필요하다.

정재왈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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