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대해부] "조사 방침"만 발표해도 신뢰도 치명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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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공정거래위원회의 '칼'은 무섭다.

할 수 있다, 없다를 정하는 '규제의 칼', 어떤 자료든 내놓으라고 할 수 있는 '조사의 칼', 이러저러한 점을 고치라고 할 수 있는 '명령의 칼', 과징금을 매기고 검찰 고발도 할 수 있는 '처벌의 칼'도 갖고 있다.

문제는 이런 칼들이 시장 질서를 바로잡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기업의 정상적 영업활동에 피해를 주거나 정부 정책과 부닥치면서까지 지나치게 휘둘러질 때다.

◇ 기업 배려 아쉬운 공정위 조사=공정위는 조사 방침,조사 시작, 조사 결과를 그때 그때마다 발표하며 해당 기업을 거론한다. "공정위는 일을 열심히 한다고 강조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심각하다.일단 이름이 거론되면 기업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다. 나중에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지거나 행정소송에서 이겨도 흠집난 이미지는 회복하기 어렵다."(A그룹 임원)

지난 7월 현장조사를 받은 오일체인의 한 직원은 '공정위의 횡포를 알린다'며 당시 상황을 공정위 홈페이지에 올렸다. "사무실에 들이닥친 공정위 직원들이 책상을 돌아다니면서 동의도 받지 않고 아무 자료나 마구 가져가더군요. 여직원 PC에서 자료를 강제로 인쇄했어요.너무나 강압적인 분위기라서 손이 떨릴 정도였습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자료는 자발적으로 제출됐고 복사한 뒤 돌려주었다.게시자의 동의를 받았다"며 이 글을 바로 삭제했다.

◇ 정부 정책 따로,공정위 따로=공정위는 지난 5월 말 자동차보험료를 담합해 인상했다며 11개 손해보험사에 51억원의 과징금을 매겼다. 손보사측은 "7% 정도는 올려야 수지가 맞는데 금융감독원의 행정지도로 3.8%만 올린 것을 공정위가 담합으로 몰았다"며 행정소송을 냈다.

공정위는 "법적 근거가 없는 행정지도에 따른 담합을 엄격히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담합으로 몰려 11억여원의 과징금을 맞았던 맥주 3사가 제기한 소송에서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11월 "국세청 행정지도를 통해 가격 인상률이 사실상 강제됐기 때문에 담합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현재 이 건은 대법원에 가 있다.

외환위기 직후부터 기업들은 구조조정 차원에서 사업부로 운영해온 부분을 대거 분사(分社)했으며,정부도 이를 적극 권했다. 1998년부터 99년 상반기까지 30대 그룹의 분사는 4백84개나 됐다. 그런데 공정위는 부당 내부거래를 조사하면서 분사한 기업에 대한 지원을 문제삼았다.

산업연구원 김용열 연구위원은 "기업 내 사업부와 분사는 다르지 않다"며 "사업부로 있을 때는 지원해도 괜찮고, 분사 기업에 대한 지원엔 과징금을 매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측은 "분사됐으면 엄연히 다른 회사며 세법도 그렇게 본다"면서 "구조조정 차원의 분사 기업에 대해선 당분간 중점 심사 대상에선 빼준다"고 해명했다.

◇ 경기 생각 않는 공정위 조사=이남기 공정위원장은 지난 1월 4일 "기업 부담을 덜어 경제 살리기에 동참할 수 있도록 상반기에는 기업 조사를 자제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李위원장은 4월 16일 말을 바꿨다."30대 그룹 중 지금까지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받지 않은 8개 그룹에 대해 형평성 차원에서 5월 초 조사에 착수하겠다. 4대 그룹 등 나머지 그룹은 하반기에 조사하겠다."

이 중 7개 그룹에 대한 현장조사는 7월에 시작됐는데, 4대 그룹 조사 일정은 아직 잡히지도 않았다.

◇ 모호한 기준=군납 유류 입찰에서 담합했다며 지난해 10월 정유 5사에 1천9백1억원의 과징금을 매긴 공정위는 이의신청이 제기되자 올 2월 3분의1도 넘는 6백90억원을 깎아주었다. 스스로 무리한 과징금을 매긴 것을 인정한 셈이다.

계열사에 대한 부당 지원 금액을 따질 때 부가가치세를 포함하는 것도 지난 6월에야 정했다. 그전에는 조사를 받는 기업이 내는 자료대로 산정했다. 기업이 부가세를 합쳐 자료를 내면 부당 지원액이 커져 과징금도 많아졌고, 부가세를 빼고 자료를 내면 지원액이 작아져 과징금도 적어진 것이다.

기획취재팀=김영욱 전문위원, 송상훈.이상렬.서경호 기자

<글 싣는 순서>

①기업활력 위축시키는 경쟁당국

②휘두르는 위험한 칼

③경쟁 막아 소비자 피해

④털어야 할 정치논리

⑤좌담-공정위, 거듭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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