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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자아존중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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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나라는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임을 깨닫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이 말은 나에게는 작은 충격이었다. 어렸을 때 나라에 충성하고 사회에 희생하는 것,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훌륭한 인생이라고는 들어봤지만 ‘너는 소중한 사람이니 자부심을 갖고 살아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스스로의 가치? 1등을 하지 않고 남들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나에게 가치가 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공부 못하는 미국 학교 아이 학부모들도, 변변치 않는 직업을 가진 미국 이웃들도 그렇게 매사에 당당한 거구나 싶었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내가 왜 그렇게 행복하지 못하고 쫓기는 듯한 초조함에 시달려 살아왔던가에 대한 해답이 그 ‘자아존중감’에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언제나 좋은 성적과 학벌, 직장과 좋은 집과 옷으로 남들한테 증명해야만 내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칭찬해본 적이 없었고, 그러니 만족할 수 없었다. 늘 주눅들고 당당하지 못했다. 힘들지만 ‘자아존중감’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니 나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겉모습과 상관없이 존중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최근 잇따른 부패 사건을 보며 혹시 저 사람들도 ‘자아존중감’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자리에 오른 것만으로도 엄청난 자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박봉에 시달린다’ ‘유혹이 너무 크다’며 핑계 대며 더 좋은 술자리, 더 큰 돈 봉투로 자신을 증명 받고자 한 건 아닐까. 무한할 수도 있는 자기의 가치를 몇 백만원짜리 술자리와 돈 봉투로 매겨버린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된 ‘자아존중감’이 필요해 보인다.

며칠 전 학교에 가서 아이 선생님을 만났다. 늘상 듣는 ‘촌지 금지’ 같은 말씀을 엄마들한테 하시는가 싶었는데, 촌지 봉투 돌려주느라 온 학교를 뛰어다닌 웃긴 에피소드를 말씀하시더니 “저 부부교사인데요, 둘이 월급 받으니 충분히 먹고살 만합니다. 그러니 정말 돈이 필요 없거든요” 하셨다. 번듯한 직장 다니면서도 ‘먹고살기 힘들다’고 징징대는 게 보통사람들인데. 그 선생님의 당당한 자부심에 흐뭇해졌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