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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의 반발에 밀려 철도개혁 대폭 후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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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철도시설 관리와 운영 주체의 분리'를 핵심으로 한 정부의 철도구조개혁 작업이 철도노조의 반발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대폭 후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내년 1월 철도공사 출범을 앞두고 정부가 내세웠던 '합리적 철도경영'이라는 개혁의 원칙을 포기한 것이어서 다른 부문의 개혁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철도노조는 2만여 조합원의 막강한 단결력을 배경으로 그동안 철도사업법 국회 상정을 저지했고, 정부와 정치권을 상대로 공사화에 따른 업무분장과 근로조건 등을 놓고 지속적으로 투쟁을 벌여왔다.

<관계기사 12면>

18일 건교부 등에 따르면 건교부.철도청.철도시설공단 관계자들은 지난달 회의를 열고 당초 시설공단이 갖기로 했던 철도의 유지보수 계획 수립권을 정부가 다시 가져 오고 정부는 이를 철도공사에 위탁키로 했다. 시설공단이 유지보수 계획을 수립하면 이를 시행할 수 있는 권한만 갖고 있던 철도공사가 사실상 유지보수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총괄하게 된 것이다.

기존 철도의 개량사업도 모두 철도공사에 위탁하도록 했다. 당초에는 철도개량사업이 선로중량화.터널개량 등 자본이 많이 투입되는 사업인 점을 감안해 시설공단이 계획권을 갖고 직접 시행하거나 일부 돈이 덜 드는 분야는 철도공사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구조개혁을 단행할 예정이었다.

정부가 당초 추진했던 철도구조개혁안은 시설관리와 운영 주체를 분리해 열차 운행 등 상업적 활동은 공사에 맡기고, 시설관리와 건설.감독 등은 시설공단이 대행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철도의 합리적 경영을 꾀할 방침이었다.

교통개발연구원 관계자는 "이번 방안대로라면 정부가 철도공사에 대한 감독을 포기하는 것"이라며 "철도개혁이 사실상 무산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건교부 관계자는 "막강한 힘을 가진 철도노조가 집단행동에 들어가면 구조개혁이 물 건너갈 것이라고 생각돼 계획을 수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찬.강갑생 기자

**노조 무서워 철도개혁 기형화 …선진국에선 시설·운영 분리

18일 건설교통부가 철도 구조개혁의 방향을 바꾼 것은 철도 노조의 반발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건교부는 당초 유지.보수 계획 수립권, 시설 개량 사업, 안전진단 업무 등을 철도시설공단에 맡긴다는 방침이었다. 철도공사는 여객과 화물 운송 같은 운영에만 전념케 하고 철도시설공단은 건교부를 대신해 큰 돈이 들어가는 철도 개량과 기존 철도의 유지.보수 등을 맡게 한다는 취지였다. 철도공사가 운영에만 전념하면 승객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실제로 건교부는 지난 6월 철도청과 철도시설공단에 "시설 개량과 유지.보수 등은 건교부의 권한을 위임받은 시설공단을 통해 한다"는 지침을 전달했다. 건교부→공단→철도청의 지휘 체계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철도시설공단 신철수 부장은 "그때만 해도 정부의 구조개혁 의지가 분명해 보였다"고 했다.

그러나 불과 5개월여 만에 그 방침이 뒤집어졌다. 건교부는 이들 업무를 내년 1월 출범하는 철도공사에 넘겨주기로 했다. 철도청의 대부분 인력은 철도공사에 합류된다. 철도 노조 관계자는 "안전운행을 위해 유지.보수와 개량 업무 등은 당연히 운영자 측에서 맡아야 한다고 판단해 건교부에 이를 강력히 요구했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건교부의 한 간부는 "내년에 원만한 공사 출범을 위해서라도 노조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노조원이 2만명인 철도 노조는 정치권에도 영향을 줄 만큼 막강하다"며 "공사 출범에 반대해 집단행동이라도 하면 구조개혁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노조의 주장에 밀렸음을 시사한 대목이다.

철도 전문가들은 "철도 선진국인 유럽의 경우 영국.스웨덴.독일 등 14개국이 운영과 철도 개량 및 시설 관리 업무를 분리하고 있다"며 "우리도 당초대로 시설공단이 전반적인 시설 관리를, 철도공사가 운영을 맡는 방향을 고수했어야 했다"고 조언하고 있다.

건교부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 공무원은 "철도 노조는 노조원들이 철도공사가 아닌 시설공단으로 옮겨갈 경우 세력 약화를 우려해 반발하는 것"이라며 "정부가 이를 다 들어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이에 앞서 정부는 2003년 4월에도 철도 민영화를 골자로 하는 철도구조개혁 관련법의 제정을 추진하다 철도 노조의 반대에 밀려 '민영화'라는 말은 법안에 넣지도 못했다. 민영화가 공사화로 후퇴한 것이다. 서울대 김광웅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부 정책은 일관성이 가장 중요한데 특정 이해당사자들을 무마하기 위해 자꾸 정책을 바꾼다면 정부의 신뢰성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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