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게이 히틀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얘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여인이 에바 브라운이다. 히틀러의 비서이자 정부였던 에바는 마지막 순간까지 히틀러의 곁을 지켰다.

소련군의 침공으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히틀러는 베를린의 총통 관저 지하 벙커에서 '귀여운 에바'와 결혼식을 올리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곧이어 에바도 음독을 함으로써 '내 사랑 아디'의 뒤를 따른다.

일생을 통해 히틀러가 가까이 지냈던 여인은 모두 여섯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카 겔리 라우발에서 에바까지 여섯명 모두가 자살을 기도했거나 자살한 것은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비극적이고, 괴기스럽다.

그 의문을 푸는 실마리가 될지 모르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는 소식이다. 독일 브레멘대에서 현대사를 연구하는 로타 마흐텐 교수는 『히틀러의 비밀-독재자의 이중적 삶』이란 저서에서 히틀러가 게이였다고 폭로해 충격을 주고 있다.

20대 청년시절 시작된 히틀러의 동성애 편력은 전용차 운전병에서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루돌프 헤스에 이르기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난잡하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에바를 포함해 히틀러가 가까이 지냈던 여인들은 그의 동성애 편력을 감추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고, 이들의 자살 기도는 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주장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누구'도 알고 보니 동성애자였다는 얘기는 역사의 진부한 에피소드다. 1995년 미국 바스대 영문학 교수인 폴 러셀은 역사 속의 동성애자 1백인의 생애를 요약한 책을 발표해 화제가 됐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여류시인 사포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프란시스 베이컨.아르튀르 랭보.오스카 와일드.버지니아 울프.마르셀 프루스트.앙드레 지드.미셸 푸코.앤디 워홀에 이르기까지 명사(名士)의 이름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미국 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정신질환의 목록에서 삭제한 것은 불과 30년 전인 74년이었다. 스스로 동성애자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커밍아웃(Coming-Out)'이 시작된 것도 그 때부터다.

"히틀러와 그의 시대에 대해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마흐텐 교수는 히틀러의 숨겨진 이면을 폭로한 배경을 밝히고 있다. 커밍아웃을 넘어 무덤 속의 동성애자들까지 밝은 태양 아래로 끌어내는 '풀링아웃(Pulling-Out)'의 시대가 시나브로 시작된 것일까.

배명복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