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호 게이트'에 멍든 기업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재기의 꿈에 부푼 제조업체를 '불법 주식투자 사냥감' 으로 악용한 구조조정전문회사(CRC)를 생각하면 속이 터집니다. "

경기도 양주에 있는 동파이프 생산전문업체인 인터피온사 직원인 K모씨는 요즘 허탈해 일손이 안잡힌다고 호소했다.

이 회사는 주가조작과 횡령혐의로 구속된 이용호 회장의 G&G그룹에 발목이 잡힌 업체 가운데 하나다. 구조조정전문회사인 G&G는 주가조작을 위해 부실기업을 인수.개발(A&D)하는 과정에서 7개업체(9월말 현재)를 직.간접적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업체는 한결같이 기업의 재기 의욕을 꺾는 주가조작의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 주가조작에 빼앗긴 재기의 꿈=짭짤한 기업으로 소문나 있던 인터피온(옛 대우금속.대우그룹과 무관)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예상치 못한 제3공장 화재로 부도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세종투자개발(현 G&G)에서 30억원(지분 13.68%)에 인수해 1백41명의 전직원은 재기의 꿈에 부풀었다.

매년 누적결손분 처리로 인해 적자를 면치는 못했지만 직원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며 용기를 잃지 않았다는 게 회사측 관계자의 설명이다.

특히 재무구조가 점차 개선되고 있어 주택경기만 활성화 되면 흑자전환도 어렵지 않을 것이란 기대도 컸다. 그러나 이번 李회장 사건으로 인터피온은 또다시 최대 위기를 맞았다.

李회장측이 부실기업을 인수한 뒤 주가조작 등으로 시세차익을 남겼다는 의혹이 제기돼 조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불법 기업구조조정전문회사와 투기장으로 변한 국내 주식시장이 다시 일어서려는 제조업체 직원들의 가슴에 못질을 하고 있는 꼴" 이라고 말했다.

가구업체인 레이디(옛 레이디가구)도 사정은 비슷하다.

레이디는 지난해 12월 부도로 인해 회사가 생사의 기로에 섰었다. 그런데 지난 6월 G&G와 삼애인더스가 유상증자를 통해 이 회사의 대주주가 된 이후 한때 일하는 분위기가 되살아 났다. 구조조정명목으로 직원을 7백명에서 1백명으로 줄이기도 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회사를 살리는 일이라면 종업원으로서 할 것은 다 했다" 고 말했다. 그러나 李회장 사건이 불거지면서 회사 사정은 전보다 더 나빠졌다.

기획실의 한 관계자는 "대주주가 주식으로 불법 시세 차익을 노리든 뭐하든 관심이 없다" 며 "임직원들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정상 운영되길 바랄 뿐" 이라고 말했다.

◇ 멀쩡한 기업도 사냥감으로 끌어들여=쌍용화재는 올해 1분기 중 1백35억원의 흑자를 내 분위기가 고무돼 있었으나 李회장 사건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다. 당초 李회장측은 지난 6월 이후 쌍용화재 지분을 24.38%(삼애인더스 21.44%.조흥캐피탈 2.94%)나 확보했다. 회사측은 여러 경로를 통해 李회장측의 주식매집 의도를 타진했으나 일절 대꾸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李회장측은 6월 27일 공시를 통해 '경영권 인수 목적이 아닌 단순투자 목적' 이라고 밝혔다.

쌍용화재 관계자는 "법적으론 쌍용의 계열사로서 우호지분을 고려하면 경영권 방어에는 문제가 없으나 주식투기꾼의 사냥감으로 지목돼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비춰짐으로써 영업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 고 설명했다.

로케트전기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로케트측은 당시 李회장이 대주주인 KEP전자로부터 케이블방송인 리빙TV의 경영권과 지분 50%를 인수했을 뿐인데 이번 사건과 직접 연루된 것처럼 소문나 곤혹스럽다는 얘기다.

로케트의 한 관계자는 "평소 관심이 있던 방송사업 진출을 위해 KEP전자로부터 정상적인 기업간 거래 방법으로 영업권을 인수했다" 며 "일반인들에게 생소하고 복잡한 매각 절차 때문에 오해를 산 것 같다" 고 말했다.

로케트는 KEP전자로부터 채널인수권을 넘겨 받을 때 세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무사.변호사 등 전문가 도움을 받아 계열사인 로케트캐피탈을 리빙TV로 이름을 바꿔 사업목적을 바꿨다는 것이다.

이는 기업 인수.합병(M&A)나 기업매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통상적인 방법이라는 해명이다.

조흥캐피탈도 지난해 11월 모기업인 조흥은행이 경영정상화 계획의 일환으로 자회사 매각을 추진하면서 李회장측이 62.8%의 지분을 인수했다.

당초 조흥캐피탈은 외화부채가 많아 환율 급등으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긴 했지만 채권단이 '청산하는 것보다는 살리는 게 낫다' 는 회계법인의 실사 결과에 따라 지원(사적화의)이 이뤄진 것이다.

이 회사의 한 관계자는 "올 1, 2분기 영업이익이 53억원, 순이익이 45억원으로 리스업계 1위를 할 정도로 건실한 기업인데 李회장측이 대주주라는 이유로 피해를 보고 있다" 며 "주주와 임직원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건전한 기업에서 인수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고 말했다.

김시래.김남중.이현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