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장진 감독 '킬러들의 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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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킬러는 냉혹해야 한다. 이를 무기로 멋을 발산하든지, 아니면 잔혹함의 깊이를 더해 관객을 섬뜩하게 만들어야 정체성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건 기존 영화에서 보았던 일반적인 킬러에 관한 얘기일 뿐. 장진 감독은 그런 킬러 만들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킬러들의 수다' 에서 삐딱한, 그리고 좀 모자라는 킬러들을 양산해 냈다. 비뚤어진 세상에 정공법으로 비수를 꽂기보다 허구의 무작위 공간에서 질러대는 고함이 더 크고 시끄러울 것으로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 영화를 코미디 영화, 그중에서도 블랙 코미디의 영역에 있는 영화라고 한다.

하지만 '킬러…' 는 그 수준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한참 초월한 팬터지의 영역까지 넘나들며 세상을 비꼬고 관객의 웃음보를 자극하려 한다.

상연(신현준).재영(정재영).정우(신하균).하연(원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목표를 해치우는 살인 청부업자들이다.

하지만 넷 모두 식탁에 차려진 반찬을 놓고 목숨을 걸 듯 말을 주고받는가 하면, 뉴스를 보되 정보에는 관심이 없고 앵커의 미모에 넋이 빠져 있는 순진한 녀석들이다.

파렴치한에겐 마음껏 총을 겨누지만 살인 청부의 대상이 된 임신부나 살인을 의뢰하러온 여고생에겐 약해지고 마는 그들. 결국 검찰에 덜미를 잡혀 쫓기는 신세가 된다.

장감독은 전작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 에서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는 상황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독특한 코미디를 구사했다. 그의 재기와 위트는 충분히 신선해 주목을 받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썰렁해 '미완' 이란 평을 듣기도 했다.

그가 '킬러들의 수다' 에선 기존의 '장진식 유머' 를 유지하되 유머에 대한 시선이 더 여유로워지고 한층 집요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웃겨야 할 듯한 시점을 그냥 넘긴 뒤 그 다음 순간에 뇌관을 터뜨리는 것을 주무기로 하면서 곳곳에 실소를 자아내는엉뚱한 대사, 무성 영화를 연상케 하는 배우들의 기괴한 자세들을 포진해 놓았다.

예컨대 정우가 연이어 임신부 살인에 실패하고 돌아오자 하연이 갑자기 감정에 북받쳐 "형은 사랑에 빠진 거야" 라며 한참 동안 사랑론을 펴는 대목은 생뚱맞기 그지 없다.

하지만 감독은 이 과정을 길게 처리하며 감동받은 듯한 동료들을 일순간 킥킥거리는 얼굴로 변모시키는데 관객은 뒤늦게 이 장면이 처음부터 의도된 희화화임을 알고 웃음을 머금는 식이다.

또 상연이 검찰청으로 자수하러 가 검사 앞에 놓인 전화기를 총으로 쏘는 행패를 부리는데도 검사(정진영)는 "전화값 5만원만 내고 가" 라고 말한다. 이 또한 상식 저편에 있다.

영화는 시종 장진식 스타일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방식도 전작보다 완숙해 보인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용인되는 그의 재능이지만 감정을 잡아채기엔 너무 '장진 스타일' 이라고 해야 할까.

감독의 의도에 감각이 꽂히면 그보다 즐거울 수 없겠으나 혹자들은 제때 익숙한 방식으로 웃겨 주지 않는 영화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코미디에 치중한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구성이 헐거워지고 연극 '햄릿' 이 상연되는 대형 공연장에서 청부 살인을 감행하는 절정부도 내용이 의외로 싱거워 흠으로 남는다.

'장진 사단' 으로 분류되는 신하균.정재영과 신현준.원빈이 뿜어내는 매력은 상당하다.

존재 자체로 젊은 관객들을 빨아들일 듯한 캐스팅이다. 얼이 빠진 듯 대사를 읊어대는 신현준의 연기가 돋보이고 신하균 역시 재능있는 연기자답게 제 몫을 해낸다.

이 영화가 데뷔작이 된 원빈은 어리광을 부리는 귀엽고 가녀린 막내 킬러 역을 무난하게 소화했다.

'킬러들의 수다' 는 킬러와 수다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조합해 제목을 만들었다. 이런 발상은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다.

혹 이 영화를 보고 웃지 않더라도 장감독의 재기발랄한 우직함은 한국 영화의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보기 좋다. 15세이상 관람가. 12일 개봉.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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