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지식사회에 묻는다] 왜 묻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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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최근 지식인 논쟁에서 두드러진 것은 그 선정적.선동적인 방식이다. '홍위병' 이 그랬고 '곡학아세' 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지식사회가 존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공론이 형성되고 논의되는 규율이라면 이미 우리 지식사회의 논쟁은 그런 규율을 내팽개친 지 오래다. 대신 도덕적 낙인찍기와 비난, 그리고 그것도 누가 얼마나 대중을 더욱 자극하느냐는 경쟁이 난무했다.

김용옥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TV라는 일방적 매체를 통해 이뤄진 김용옥 교수의 강의는 그 내용의 진위와 무관하게 아카데미즘을 선정적으로 해독함으로써 야기된 문제였다.

지식사회의 이같은 선정주의는 곧 상업주의로 귀결된다. 지식의 상업주의화는 소위 '이론의 대중화' 란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식사회가 대중에 영합해 상업주의적 글쓰기에 주력함으로써 지식사회는 스스로 자율성을 훼손해왔다. 대신 얻은 것은 대중의 우중화(愚衆化)와 분열이었다. 이런 결과에 대한 책임은 좌파든 우파든 마찬가지였다. 좌파 상업주의는 좌파 내부에서도 심각하게 지적된 지 오래다.

섣부른 시장논리와 도덕적 선정주의가 결합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오늘의 한국 지식사회의 선정주의는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현실과 긴장관계 속에서, 그리고 지식사회의 공론의 규율 안에서 이뤄져야 할 논쟁이 이슈선점식의 포퓰리즘에 의해 지배됨으로써 그들이 해결해야 할 현실을 더욱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식사회는 상업주의로부터 자유로운가' 를 시리즈 둘째 질문으로 묻고자 한다.

김창호 학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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