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보내온 드라마 '여인천하' 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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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SBS드라마 '여인천하' 에선 최근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왕과 신료, 그리고 왕비와 후궁들이 약 두 달째 논란을 벌이고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여인천하' 를 보고 이에 대한 평을 보내왔다.

시청률 1~2위를 다투는 인기드라마 '여인천하' 에서는 요즘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궁중 여인들 사이에 암투가 한창이다. 극중 홍경주(洪景舟)가 적서(嫡庶)보다는 왕자들의 자질을 살펴서 세자를 결정하는 게 옳다고 주청한 것을 계기로 왕세자 책봉시험이 벌어진다.

중종과 자순대비.윤비, 그리고 신료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시험에서 원자를 비롯해 경빈 소생 복성군 등 네 왕자가 최종 후보에 오른다. 어린 원자가 답변을 아주 잘하자 경빈이 왕세자 시험에 흑막이 있다고 의심함으로써 드라마는 다시 추리의 세계로 시청자를 끌고 간다.

많은 시청자들은 왕세자 책봉시험을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지만, 실제로는 당시 그런 시험은커녕 홍경주가 정말 적서 구별 없이 자질에 따라 왕세자를 책봉하자고 주장만 했어도 그는 사형 당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원자라는 말은 미래의 정치일정을 담은 법적 용어였다. 원자로 정호되면 큰 이변이 없는 한 세자로 책봉되고, 임금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당선자의 신분과 비슷한 지위가 원자요, 이는 차기를 둘러싼 권력투쟁을 차단하고 투명한 정치일정을 보장하기 위한 엄격한 장치였다.

그렇지 않으면 '여인천하' 에서처럼 차기를 둘러싼 암투 때문에 조정이 매일 시끄러웠을 것이다. 중종 14년 무렵부터 세자책봉 문제가 논의되지만 누가 세자가 될 것인가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원자로 결정되어 있어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대개 7세 무렵인데 드라마의 시대인 중종 때는 다섯 살 때 논의되어 여섯 살 때 책봉되었다. 그만큼 중종은 하루라도 빨리 원자를 세자로 책봉해 자신의 후사를 투명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자책봉 시험은 작가의 의도적 창작이거나 그 시대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발생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시대의 기본 성격과 갈등구조는 훈구파와 사림파, 유교세력과 불교세력의 대립이지 궁중 여인들의 암투가 아니다.

최근 '여인천하' 를 비롯한 사극이 인기를 끄는 것은 시청자를 역사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적극 환영할 일이지만 그 시대의 기본구조나 그 사건의 기본성격을 무시한 전개는 역사를 오도한다는 점에서 해(害)가 될 수도 있다.

그간 기회 있을 때마다 역사드라마에 역사학자의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방송사에서 거들떠보지 않은 이유는 역사학자가 참여했을 경우 왕세자 책봉시험 같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영상화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허무한 상상으로 뒤틀지 않아도 역사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란 사실을 왜 모르는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硏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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