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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문학상 후보작] 김혜순 '낙랑공주' 外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김혜순씨는 꾸준히 몸을 주도 동기(leitmotif)로 삼아온 시인이다. 내남 어느 것 없이 몸을 경계/이음매로 삼은 그녀의 상상적 율동은 날렵했다.

그러면서도 언어적 가학을 즐기는 여느 시인과 달리 읽는이를 짓누르지 않는 견실함까지 갖추었다.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울림으로 읽는이에게 되돌려주는 시인의 미덕은 이즈음 시에서도 예외없이 빛난다.

"숨막히게 크고/검은" 호수 경관에서 얻은 흔치 않은 감동을 다룬 시가 '티티카카' ( '인스워즈' 2001년 1월호)다. 시인은 몸을 커다란 한 고막으로 부풀린 채 그것을 고스란히 갈무리했다. '허공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 ( '시안' 2000년 가을호)에서는 어느 "물구나무 기록 보유자" 의 거꾸로 걷는 몸과 철잊은 겨울 동백꽃 사이에 마련된 비유적 자장이 삶의 어려움을 차분하게 일깨운다.

'흐느낌' ( '세계의 문학' 2000년 겨울호)은 "몸 속으로 깊이" 숨어 들었던 "눈물이" 몸 바깥으로 "넘쳐" 흐르는 자의식을 감각적으로 펼쳐 보인다.

바깥 대상에 대한 내 몸의 반응이나 다른 사람의 몸에 대한 관찰, 또는 내 몸 안쪽의 작용을 다루고 있어 상상력의 방위가 다채로움을 알 수 있다. '낙랑공주' ( '세계의 문학' 2000년 겨울호)는 이러한 김혜순 식의 몸 상상력이라는 쪽에서 보면, 다른 사람의 몸과 내 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간섭현상을 극적 독백 형식으로 담은 작품이다.

그러면서 그 틀은 "그녀가 온다" , "그녀가 운다" , 그리고 "그녀가 울면서 온다" 로 드높아가는 월로 단단하게 묶었다. 아버지에 맞서 "아버지의 궁성" 을 지켜줄 북을 찢어버린 고대서사 속 여성영웅, 낙랑의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과 하나로 공명시키는 격렬한 과정이 자연스런 숨길을 갖춘 셈이다.

문제는 아버지의 권력, "아버지의 군대" 를 배신하고, "아버지의 북" 을 찢는, "그녀의 마음" 또한 찢어지는 아버지의 한 북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북은 몸의 다른 이름, 그러한 자기당착을 온몸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을 낙랑과 시인이 하나로 겹쳤다 떨어지고 떨어졌다 다시 겹쳐지는 맥놀이가 처연하다. 아름답다. 폭발하기 앞서 "떠들썩한 텔레비전 방송국" "물쥐들" 에게 갉아 먹힌 "머릿속" 같이 어지럽다.

가부장제 현실에 대한 성찰이라는 시인의 오랜 주제의식에 몸저린 아픔이 부쩍 더했다. 바람이 썰물처럼 빠져버린지도 모른 채 가죽만 두텁게 남아 있을 뿐인 큰북, 서울로 표상 되는 한국형 남성권력은 자성의 계기도, 변화의 전망도 잊어버린 채 단조로운 북소리만 거듭하고 있다. 마침내 그 강고함이 시인을 어느 구석까지 밀까. 뚜렷한 사실은 그녀도 어느덧 호혜적 반전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옛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새 아들의 어머니로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은 김혜순 시의 율동에 많은 변모를 끌어들일 것이다. "철철 넘쳐" 흐르는 그녀의 "쓰라린" 상상력이, 몸이, 북소리가 저 "허공에 뿌리" 내린 새로운 "태풍의 눈" 이 될 것인가. '유화' 에 이어 스스로 옛 나라 슬픈 사랑의 주인공, '낙랑공주' 의 찢어진 북과 북채를 제 몸으로 챙긴 시인의 비린 춤마당과 음역이 더욱 깊어질 것을 믿는다.

박태일 <시인.경남대 교수>

◇ 김혜순 약력

▶1955년 서울 출생

▶79년 '문학과지성' 통해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 『나의 우파니샤드』 『불쌍한 사랑기계』 등

▶김수영문학상.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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