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살리기 급하다] 下. 기업가치는 스스로 지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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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국내경기 침체에 대해 최고경영자(CEO)들도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달 사장단 회의에서 강조한 말이다. 세계 경기가 나빠졌기 때문에, 정부가 발목을 잡는 게 많아서, 각종 인프라가 미비해서 등의 변명에 앞서 기업 스스로 가치를 키워나가는 게 본연의 사명이라는 얘기다.

외환위기 때인 1997년 12월, 파산위기에 몰린 한국전기초자의 대표이사에 취임해 불과 1~2년 만에 회사를 초우량기업으로 탈바꿈시킨 서두칠 전 사장. 그는 1년 3백65일을 회사에서 살며, 종업원들에게 1백회가 넘는 '경영설명회' 를 통해 모든 것을 공개했다. 회사 치부까지 다 드러내고 이해를 구했다. 노사문제도 강성노조 탓만 할 일이 아니다.

사장이 앞장서 뛸 때 노사화합도 이뤄진다는 게 한국전기초자의 교훈이다. 살아 남기 위한 변화의 첫 단추는 역시 기업 스스로 꿰어야 한다.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기업마저 몸을 사리면 경제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꿀 방법이 없다.

◇ 모든 게 하기나름이다=LG건설은 외환위기 때 그룹내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빅딜(대규모 사업교환) 대상으로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올 상반기 경상이익이 1천억원을 넘는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냈다.

'만년 불황' 에 시달려온 건설업종에서 거둔 성과여서 더욱 돋보인다. 이 회사 관계자는 "개혁이나 구조조정 같은 거창한 말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며 "오로지 이익을 내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매달린 것" 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최근 임원 친척 등 특수관계인과 거래할 때는 반드시 이사회 결의를 거치도록 하는 제도까지 도입했다. 사외이사 제도는 많은 기업들이 여전히 부담스러워한다. 그런데 올 상반기 사상 최대 이익을 낸 INI스틸(옛 인천제철)은 "사외이사 덕을 크게 보았다" 고 설명한다.

이 회사는 98년 처음으로 10명의 이사 중 4명을 사외이사로 임명했다. 그러다가 지난 해엔 사외이사를 8명으로 늘렸다. 사내이사는 이제 2명뿐이다.

사연은 이렇다. 98년 사외이사로 임명된 민동준 연세대 교수(금속공학과)는 내수.수출부진으로 감산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를 듣고 생산현장을 누볐다. 민교수는 원료 투입물량에 비해 제품 생산량이 적다는 것을 알아내고 제품회수율(원료 투입분 대비 생산량)을 높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1년여 동안 직원들과 머리를 맞댄 결과, 전기로 작업 때 산소량을 줄이면 회수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찾아냈다. 결국 회수율을 5% 이상 높일 수 있었다.

회사측은 "수십억원대의 비용절감이 이뤄졌지만 그보다도 민교수가 불어 넣은 '개혁열풍' 으로 회사 분위기가 달라져 얻은 이득은 돈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 라고 말했다.

◇ 변해야 산다=최실근 증권거래소 상장공시 부장은 "최근 경영실적이 좋은 기업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지배.수익구조 등을 확 바꾼 게 공통점" 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투명해지면 종업원들의 이해를 구하기가 쉽고, 외부자금 조달도 쉬워지며, 기업 이미지가 높아져 제품판매에도 효과가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것.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철강.반도체.자동차산업 등 우리나라 간판산업들은 대부분 숱한 난관과 반대를 뚫고 성공했다" 며 "전망이 불확실하다고 다들 몸을 사릴 때 가능성을 찾아 과감히 도전하는 기업이 결국 승자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 민.관의 팀워크를 살리자=경제를 살리려면 정부.기업간 손발이 맞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정부와 재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심각한 부진을 겪고 있는 수출전선에서 민.관협력이 시급하다. 오영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사장은 "외환위기 후 종합상사의 해외지사망이 절반 가량 쪼그라들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할 시스템이 절실하다" 면서 "전세계 KOTRA 지사를 중소.벤처기업들이 수출.해외진출 전진기지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고 말했다.

지난달 제주도에서 열렸던 전경련 주최 하계세미나의 최대 이슈는 '기업 기(氣)살리기' 였다. 재계 인사들은 "재벌을 죄벌로 보는 시각을 고치고, 잘 하는 기업은 격려를 해주는 풍토가 아쉽다" 고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정경유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많은 정부 인사들은 기업인 만나는 것을 꺼리는 것 같다" 며 "시대가 달라진 만큼 이젠 이런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시래.이세정.홍승일.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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