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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쌀은 풍년 농정은 흉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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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풍년이 예상되는 데도 오히려 걱정만 쌓여갑니다. "

농림부 청사 4층에 마련된 '쌀생산대책 추진본부' 는 요즘 예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일부 직원들은 뜻밖에 풍년이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풍년이 되더라도 1천만섬에 달하는 쌀 재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올 추곡수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한달 앞으로 다가온 수확기에 쌀값이 폭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르고 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는 사람이 없습니다. "

21일 열린 전국 농협 조합장들의 기자회견장에는 농정에 대한 신랄한 성토와 함께 농가 경제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사정이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자 김대중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쌀 재고가 많아지면 쌀값이 하락해 오히려 농민소득을 감소시킬 수 있다" 며 대책 마련을 서두르라고 관계부처에 지시했다.

따져보면 이런 일은 일찌감치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농림부는 올들어 쌀 재고 문제의 심각성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면한 측면마저 있다.

올초 새만금 간척사업 재개 여부가 도마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지금도 남아도는 쌀이 많은데 또 다른 농경지를 만들어 쌀이 더 쏟아져 나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고 지적했었다.

이에 대해 농림부 간부는 "쌀이 남는다는 사실이 부각되면 해마다 1백만섬 이상의 쌀을 쏟아낼 대규모 농경지 확보 사업의 명분이 흐려진다" 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장기적인 쌀 수급 전망에 기초한 종합 정책 수립이 아쉬운 대목이다.

한 일선 농협 관계자는 "쌀 재고가 넘쳐나는데도 정부는 올 봄까지도 고품질종 재배보다는 다수확 품종을 장려했다" 며 정부의 일관성 없는 대책을 비난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정부는 2004년으로 예정된 쌀시장 추가 개방 협상을 앞두고 쌀재고 대책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일본처럼 장기적으로 휴경 등 감산정책을 고려해야 할 시점은 아닌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모든 경제 정책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더 늦기 전에 정치 논리에서 벗어나 쌀 수급대책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양정(糧政)이 문란해지면 나라가 위태롭다는 옛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홍병기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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