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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농민들 새 화폐 불신해 식량 안 팔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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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화폐 개혁 직후에 북한의 정책이 갈팡질팡하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요즘 북한 주민들은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 나라에 유익한 정책을 배워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2005년 북한에 들어가 5년 동안 지방을 두루 돌며 농촌개발사로서 농업지원 활동을 해온 ‘저먼 애그로 액션’의 카린 얀츠(여·사진) 박사가 20일 중국 베이징(北京)의 독일대사관에서 주요 외신들과 만나 자신이 목격한 북한 실태를 공개했다. 25년간 동아시아에서 활동해 중국어·한국어도 일부 구사하는 그는 “북한 정권은 60여 년간 지탱해왔고, 90년대 말에는 최악의 대기근을 견뎠기 때문에 조기 붕괴 가능성을 속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활동 중인 세계 최대 규모의 비정부기구(NGO)인 저먼 애그로 액션은 1997년부터 북한에 6000만 유로(약 900원)어치의 식량과 물자를 지원해왔고 평양에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화폐개혁 뒤의 북한 상황은.

"북한 사람들에게는 재앙 그 자체였다. 북한과 거래하는 사람들도 큰 타격을 받았다. 화폐개혁 직후 1유로당 40원 하던 환율이 일주일 뒤 140원으로 뛰었다. 그러나 그 동안 평양 고려호텔의 커피값은 변동 없이 160원이었다. 다양한 물자가 거래됐던 통일장터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돼 일부 식품만 팔고 있다. 새 화폐를 불신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손에 쥔 식량을 내다 팔려고 하지 않고 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핵실험과 유엔 제재의 영향은.

“에너지 문제가 특히 심각했다. 전기가 끊겨 지난겨울에는 평양의 우리 사무실에도 난방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다. 그래도 북한은 외부의 제재를 내부체제 결속에 이용하고 있다.”

-주민 접촉 경험은.

“여러 번 만나 친해진 북한 농촌의 한 여중생이 나에게 (미국 영화 배우) 키아누 리브스와 안젤리나 졸리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고 묻더라.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DVD로 영화를 봤다고 하더라. 철학에 관심 많다는 또 다른 학생은 나에게 마르틴 루터(독일 종교 개혁가)와 임마누엘 칸트에 대해 묻기도 했다.”

-북한 관리들도 만났나.

“외무성과 농업성 관리를 주로 접촉했다. 그들과는 인내심을 갖고 길고 긴 대화를 해야 했다. 그러면서 북한 관리가 ‘아니오(NO)’라고 할 때는 거부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얘기 해 보자’라는 뜻이란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일반 주민들이 김정은이 3대 후계자란 사실을 알고 있나.

“김정은의 생일이었던 1월에 평양의 한 직장에 출근한 사람들이 생일 축하 행사에 별도로 참석하러 가는 것을 확인했다.”

-북한의 개방 가능성은.

“개방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엘리트들이 중국·유럽에 나가 선진 문물을 배워 자신을개조하려는 생각도 엿보였다. 북한 사람들도 잘 살기를 갈망하고 있고, 잠재력도 있기 때문에 절망적이지는 않아 보였다. 인프라도 개발하지만 핵 문제에 가려 외부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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