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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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제2장 신라명신

언덕길을 오르는 도로 위에는 떨어진 꽃잎들이 죽어서 어지럽게 하얗게 쌓여 있었다.

저렇게도 아름다운 꽃잎이 저렇게도 야속하게 떨어질 수 있다니, 저렇게도 아름다운 봄날이 저렇게도 덧없이 가버릴 수 있다니.

나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운다' 는 유행가의 가사를 떠올렸다.

원래 이곳 일대는 지금은 사카모토(坂本)라고 불리지만 옛날에는 오토모쿄(大友鄕)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이름이 가리키듯이 이곳은 주로 오토모(大友)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던 집성촌이었던 것이었다.

오토모의 성을 가진 사람들은 한국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이곳 일대에서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독자적인 족장(族長)을 선출하고는 자신들의 지도자를 촌주(村主)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불렀다.

일본의 고대어로 촌주는 '스쿠리' 로 발음하는데 이는 한국 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인 것이다. 특히 저명한 역사학자인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긴 역사 속에서 변천해온 촌주의 성격을 동일시점에서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촌주라는 말은 족장과 연결되며, 이는 신라의 관위, 관직명으로 되기 전에 귀화인(歸化人)에 의해서 족장을 의미하는 일반적 명칭인 '촌주' 가 일본에 들어와 그것이 귀화인 집단의 장의 경칭, 또는 존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

이렇듯 이곳에 살던 오토모씨는 자신들의 족장을 신라에서 지방토착 세력들이 사용하던 '촌주' 라는 명칭으로 부름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이 신라에서 건너온 도래인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미데라(三井寺)의 원이름은 온조지(園城寺).

이 온조지는 이곳 일대에 살고 있던 신라인들, 즉 오토모씨들의 씨사(氏寺)였던 것이다. 때문에 아직도 온조지 경내에서 출토되는 고와(古瓦)들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유물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벚꽃들이 핀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서 생각했다.

어째서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의 군사와 미카타(三方)에서 대결하기 직전 이곳 일대의 마을들을 불태워 초토화시켰던 것일까. 그것은 이곳 일대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오토모씨들, 자신들만의 절을 건립하고, 자신들만의 집성촌을 이루고, 자신들만의 자치세력을 만들어 '촌주' 라는 이름의 족장으로 통치하던 신라세력들이 다케다 신겐의 세력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과 결전을 벌이기 직전 이곳의 마을들을 불태워버림으로써 화근을 미리 제거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몇번이고 강조하는 말이지만 다케다 신겐의 시조는 '신라사부로(新羅三郞)' .그렇다면 신라사부로는 신라계통의 도래인들이 큰 세력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던 이곳과 분명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가을, 나는 혼자서 이곳을 찾아왔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불태워 잔인하게 죽인 비와코 근처의 사카모토 마을을 내 눈으로 보고, 또한 그곳 일대 신라 도래인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미데라를 찾아가서 그곳이 신라 사부로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나름대로 현장답사를 통해 역사의 비밀을 밝혀 보리라고 결심하고 떠난 첫 여행이었던 것이었다.

또한 나는 개인적인 호기심도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것은 신라사부로가 입던 '붉은 갑옷' 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다케다 가문이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에 의해서 멸문이 되어버린 후 사라졌던 '풍림화산' 의 깃발과 '붉은 갑옷' 에 대한 추적은 수백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에 사라져버린 줄만 알았던 깃발이 전혀 엉뚱하게도 운봉사(雲峰寺)란 절에서 발견되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난 가을 오토모들의 씨사였던 미데라를 찾아가면서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붉은 갑옷 역시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될지도 모른다. 다케다 가문의 시조였던 신라사부로의 고향이었을지도 모르는 오토모쿄, 그들의 씨사였던 미데라 경내에서 그 붉은 갑옷을 발견해 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데라 경내에서 내 손으로 그 붉은 갑옷을 찾아낼 수 있다면 나는 온 일본영토가 진동할 수 있는 엄청난 대 특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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