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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교토를 출발한 기차는 곧 터널로 접어들었다. 기차는 한참 동안이나 어둠 속을 달렸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갑자기 눈부신 광명이 느껴졌다. 교토를 출발할 때는 간간이 봄비마저 흩날리고 있었는데 터널을 뚫고 나오자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날씨가 완전히 바뀐 모양이었다.

눈부신 햇살 저편에서 박살 난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는 호수가 보였다. 비와코(琵琶湖)호수였다. 호수를 향해 흘러내린 산비탈을 따라 함박눈이 쌓인 듯 설산(雪山)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눈이라니.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리면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4월의 날씨에 춘설(春雪)이라니.

그것은 그러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벚꽃이었다. 벚꽃을 눈으로 착각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비와코 호수를 향해 흘러내린 언덕들은 지난밤 폭설이라도 내린 듯 활짝 핀 벚꽃들로 인해 백설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었다.

그뿐인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교외선 차창 너머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일본식 특유의 주택들마다 마침 절정기이기라도 한 듯 각양각색의 벚꽃들이 와사등(瓦斯燈)처럼 휘황한 불빛의 등불들을 한껏 뿜어올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雪國)' 의 첫 장면을 떠올렸다.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 고장(雪國)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환해졌다. 기차는 신호소(信號所)앞에서 멈췄다…. "

가와바타의 소설 '설국' 의 유명한 첫 구절처럼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그대로 설국이었던 것이다. 눈으로 뒤덮인 설국이 아니라 눈부신 벚나무의 앵화(櫻花)로 뒤덮인 화국(花國)이었던 것이었다. 가와바타가 그 첫인상을 '밤의 밑바닥이 환해졌다' 라고 표현한 것처럼 터널을 벗어나자 햇살을 받고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이고 있는 비와코 호수로 인해 온통 벚꽃으로 뒤덮여 있는 설원의 밑바닥이 환해진 느낌이었다.

비와코 호수.

일본 내륙지방에 있는 최대의 호수.

예부터 일본 사람들은 이곳을 오미(近江)지방이라고 불렀다. 비와코 호수를 중심으로 이 오미 지방은 주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의 집단 이주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이 일대에는 도래인들의 유적지가 산재해 있어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순례해야 하는 역사의 탐방지로 알려져 있는 고장이기도 한 곳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의 군사와 1572년 미카타(三方)에서 대결하기 직전 이곳 일대의 세력을 불태워 초토화시켜 버렸던 것이다. 오다는 우선 이곳에 있는 엔랴쿠지(延曆寺)를 공격하여 승려들을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다. 그 당시 엔랴쿠지라면 전국 최대의 사찰로 최고의 승병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오다는 이들을 모두 잔인하게 불태워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뿐인가.

오다는 비와코 호수를 향해 형성된 수많은 마을들도 모두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일까.

오다는 다케다 신겐의 무적 기마군단과 죽느냐 사느냐는 운명적인 대회전을 벌이기 직전 어째서 흰 벚꽃들로 뒤덮여 마치 함박눈이 내려쌓인 듯 설산을 이루고 있는 저 아름다운 비와코 호수의 마을들을 불태워 초토화시켜 버렸던 것인가.

그뿐이 아니다.

오다는 다케다 가문을 멸망시킨 후 바로 이 비와코 호수의 동쪽 아즈치(安土)라는 곳에 거대한 성을 쌓아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일대가 다케다 신겐의 가문과 무슨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다케다 가문은 대대로 후지산 일대의 가이(甲斐)지방을 무대로 4백년 이상 번영의 극을 달려왔었다. 그러나 이 다케다 가문의 시조는 바로 신라사부로(新羅三郞). 바로 신라사부로의 본향(本鄕)이 어쩌면 이 비와코 호수 일대가 아니었을까.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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