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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무리한 환율 방어가 혼란 부채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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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달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원-달러 환율은 최근 3주간 약 40원 급락했다. 수출기업에는 당연히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어느 정도 우리가 자초한 결과다. 지난해에 달러가 주요국 통화에 대해 약세를 보이면서 엔화 가치는 10.8%, 유로화 가치는 20.1% 절상됐다. 그런데 유독 원화는 0.5% 절하됐다. 우리 외환당국이 얼마나 강력하게 외환시장에 개입을 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시장에 알려진 환율방어의 마지노선은 달러당 1140원이었다. 환율 방어를 위해 역외선물환(NDF) 등 파생상품에서 손해본 액수가 1조8000억원에 달한다.

물론 이 모든 조치가 우리 경제의 유일한 버팀목인 수출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수출이 잘될 때 환율방어를 통해 수출이 더 잘 되도록 하는 바람에 막상 수출부진이 예상되는 현 시점에 와서는 환율절상의 충격이 더욱 커져 버렸다. 불을 활활 지펴 방안 온도를 지나치게 따뜻하게 만들자 식구들이 옷을 벗어던졌는데, 갑자기 기름이 떨어져 불이 꺼지니까 싸늘한 냉기에 적응을 못 하고 온 식구가 감기에 걸린 꼴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1997년에도 있었다. 당시 외환당국은 달러당 1000원을 마지노선으로 설정한 후 외환시장에 개입했고, 선물환까지 활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의 결과는 비참했다. 달러가 점점 부족해지고 만기가 도래한 선물환결제수요가 몰리는 바람에 달러가 더욱 부족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것이다. 외화부족 현상이 심화되면서 당국은 결국 선물환을 통한 외환시장 개입을 중단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기나긴 위기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당시는 환율방어의 마지노선이 1000원이었고 최근에는 1140원이었다는 점, 그리고 개입목표가 당시는 절하를 막는 것이었고 지금은 절상을 막는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파생상품을 이용한 개입을 했다는 점, 그리고 슬쩍슬쩍 시장에 개입해도 될 일을 너무 열심히 개입하는 바람에 실탄을 다 소진해버려 결국 환율변화를 더욱 급격하게 만드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2003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5307억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약 5%에 이른다. 미국은 기축통화 발행국이므로 미국이 적자를 본 만큼 달러가 전 세계로 풀린다. 즉 지난해 한 해 동안 5307억달러가 새로 공급됐다는 것이고 이는 곧 달러가치에 상당한 하락 요인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달러 약세는 예정된 일이라는 얘기다.

외환위기 1년 전인 96년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적자는 GDP의 6% 수준이었다. 만일 기축통화 발행국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외환위기 직전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열심히 수출해 먹고사는 한.중.일 3국과 대만.싱가포르.홍콩은 약 2조달러 가까운 돈을 외환보유액으로 쌓아놓고 있다. 달러를 사재기함으로써 자국통화의 가치가 절상되지 않도록 막아서 수출 감소를 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최근 중국을 중심으로 달러자산의 보유규모를 줄이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면서 사태는 긴박해지고 있다.

이제 당분간 원화절상을 인위적으로 막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외환시장 개입으로 원화절상의 대세를 거스르기 어렵다. 그보다는 엔화와 원화 간 환율을 10대 1 비율로 유지하는 게 우리의 수출경쟁력에 더욱 중요하다. 원-엔 동조화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다.

최근 급격한 원화절상과 중소수출기업들의 아우성은 정부가 미리부터 원화절상을 유도하고 수출기업들이 충분히 적응할 수 있도록 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온탕.냉탕을 오가는 정부의 환율정책은 결국 정작 필요할 때 손을 쓰지 못하면서 시장변동성 증가의 원인을 제공할 뿐이다.

윤창현 명지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