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개혁 실패땐 더 우경화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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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9일의 일본 참의원 선거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의 축제' 는 끝났다.

지난 4월 자민당 총재에 선출된 고이즈미는 이번 선거를 압승으로 이끌었고 그를 추대했던 당내 원로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선거를 앞두고 설익은 개혁플랜을 서둘러 발표해야 했지만 그는 큰 인기를 누렸다. 고이즈미의 튀는 발언과 행보는 경색된 정치에 식상한 채 우상(偶像)을 애타게 기다렸던 일본인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파벌이 엄존하는 일본 정치의 현실에서 보자면 당내에 자신의 세력이 별로 없는 고이즈미에게 이번 선거의 승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고이즈미에게 이번 승리는 오히려 자민당 내 반(反)고이즈미파와 대결을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봐야 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자민당 내 다수 세력인 하시모토(橋本)파는 고이즈미의 인기를 십분활용하기 위해 총리가 내건 '성역(聖域)없는 개혁' 에 지금까지 한마디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래서 이 파벌은 '파벌 혁파' 를 내세운 고이즈미의 인기에 편승해 오히려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일본 사회의 보수우익 역시 그의 높은 인기에 무임승차했으며 왜곡 역사교과서를 지지했던 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 유권자들이 던진 표는 반세기 가까이 집권했던 자민당을 향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이즈미란 인물이 내건 개혁의 깃발에 거는 기대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해석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만큼 개혁이란 구호에 익숙하고 또 열광하는 국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나라에 뭔가를 저지를 것만 같은 정치인이 지도자로 등장했을 때 우려와 함께 묘한 흥분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흥분을 단순히 감정적 반응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일본이 구조개혁을 통해 차분한 나라로 자리잡는 것이 한국에 불리하진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 반대하는 이들이라면 일본 경제가 계속 곤두박질하고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때 우리에게 다가올 결과가 과연 어떨까 따져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그만큼 국경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일본 경제가 엄청난 파장을 미치는 국제경제 동향에 끈끈하게 연결돼 있다. 게다가 한.일 양국의 산업연관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외교문제와 관련, 고이즈미의 개혁이 성과를 거두어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좀더 성숙한 역할을 해주는 편이 우리에게 더 낫다고 본다.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일본 외교의 숙제인 평화헌법 개정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도모할 가능성이 있는 고이즈미 내각이다. 게다가 미국 부시 행정부의 자세가 일본을 그런 방향으로 내몰 여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 선거과정에서 헌법개정이나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등은 핵심 이슈가 아니었다. 여론이 엇갈린 채 여전히 민감한 문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가 안정되면서 일본 국민은 주변국이 우려하는 외교문제에 대해 보다 냉정한 판단을 할 여지가 있다. 거꾸로 개혁실패와 경기악화는 일본 사회를 더욱 우경화로 내몰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개혁에 이웃나라가 거들 입장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개혁의 성패와 일본 사회가 겪을 변화에 따른 진통의 불똥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튀게 마련이다.

축제가 끝난 일본 정치판을 긴장감 있게 지켜봐야 할 이유다.

도쿄 = 길정우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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