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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3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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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임신한 어머니가 반 시간 정도를 서성거리다가 쫓아 들어가서 한참을 따지고 나서 아버지는 경위서만을 쓰고 나왔다. 어머니는 무엇보다 우리는 이북이 싫어서 삼팔선 넘은 사람이다, 쌀 주고 밥 좀 해달라는데 우리도 전쟁 통에 새끼들 데리고 살아남아야지, 총 가진 군대에게 안 하겠다고 할 사람 있으면 나와 봐라, 등등 여러 말을 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이러저러한 유명인사들의 전쟁 회상 기록을 보면 서울 수복 후에 사회 분위기가 한강을 넘은 도강파와 잔류파로 분류되었는데, 한강 인도교는 저희가 끊어 놓고 피난 못 갔던 사람들을 수상한 물이 든 사람 정도로 취급을 했다고 원망하고 있었다. 이후 분단된 남쪽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도 분명하게 그리고 되도록이면 미움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데서 살아남을 구멍이 생긴다는 것을 점점 더 뚜렷이 알아가게 된 세월이었다. 우리 세대의 친구들끼리 술자리에라도 앉았다가 우연히 꿈 얘기가 나오면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 어릴 적 육이오 때와 나중에 커서 군대 갔던 때의 일이 꿈에 보인다는 것이다. 모두들 피란을 가는데 혼자만 떨어져서 부모를 찾느라고 애를 쓴다거나, 폭탄이 터지는 거리에서 헤매거나, 아니면 군대에서 선착순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맨 꼴찌를 하는 꿈들이었다. 이것은 마음 깊숙한 곳에 남은 상처들일 것이다. 어려서 어른들의 등 뒤에 숨어 있었던 우리가 그러할진대 우리 위의 세대는 직접 그 상처를 뇌리와 심장에 새겼을 터였다.

어쨌든 난리는 계속 중이었지만 우리 동네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예전처럼 아이들이 다시 돌아와 서로 놀자고 불러댔다. 무너진 공장 건물이나 빈터의 사방에 총탄과 포탄이 무더기로 버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실탄을 주워다가 앞의 총알을 빼내어 탄피 속에 있는 화약을 꺼내어 모으곤 했다. 구경 오십짜리의 기관총 탄환이 제일 인기였는데 굵기가 달랑무 정도여서 심지를 박아 석유를 넣고 그 위에 깡통을 씌우면 그럴듯한 손전등이 되었다. 기관포 탄피 속에서는 굵은 연필심 같은 화약이 수북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파이프를 자르고 나무 손잡이를 달아 사제 단총도 만들었다. 사방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어떤 녀석은 겁도 없이 박격포탄을 돌로 때려서 분해하려다가 부근에 섰던 아이들과 함께 날아가 버리기도 했다. 나도 양철 물받이 파이프를 주워다가 장난감 대포를 만들어 안에다 화약을 넣고 꽁무니의 못구멍을 뚫은 곳에 불을 붙여 실험을 해보았는데, 불을 붙이자마자 요란한 폭음과 함께 양철이 통째로 날아오르는 바람에 혼비백산했다. 폭음 때문에 한동안 귀가 들리지 않아서 고막이 뚫어진 줄 알았다. 하여튼 동네끼리의 아이들 전쟁놀이는 예전 모래더미 위에서 기 뺏기를 하던 것과는 아예 달라졌다. 어른들이 나서고 경찰이 단속을 하면서 폭발물은 모두 압수되었다. 학교는 아직도 개교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곧 압록강까지 올라가 이북이 모두 수복된다는 얘기더니 추워지면서 우울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참전해서 아군이 후퇴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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